삼성전자 파운드리는 미국에 신규 공장을 다 지어놓고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안 굴릴 수는 없는데 사실상 고객이 없어 손실 가중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슬라로부터 대규모 수주를 따내면서 가동을 위한 마중물을 부었다.
미국 파운드리 공장인 테일러팹엔 수십조원이 넘는 투자비가 투여됐고 전체 투자비 예정액은 50조원에 달한다. 테슬라 수주로 투자 리스크를 완화했을뿐 아니라 투자의 전략적 정당성도 확보했다. 다만 테슬라 수주가 막대한 규모여도 실질적으론 연간 2조7000억원 수준이어서 투자비 회수는 장기화가 불가피하다. 삼성전자는 시설 투자를 단행하면 5년 기한으로 감가상각을 단행한다. 관련 비용 처리를 위해선 테일러팹 가동을 위한 추가 수주가 필요하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이달 테슬라와 공급계약을 맺은 인공지능 반도체(Al6)는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테일러시 공장(테일러 팹)에서 생산된다. 2nm(나노미터) 공정으로 생산을 진행할 전망이다. 공급계약 규모는 165억4416만 달러, 한화로 23조원에 육박한다.
테일러 팹은 앞서 삼성전자가 TSMC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2021년부터 짓기 시작했다. 첨단 파운드리 공정을 적용해 건설과 설비 등에 170억달러를 쏟았다. 1998년 텍사스 오스틴에 첫 미국 파운드리 공장을 완공한 이후 20여년 만의 초대형 투자였다.
공장은 2022년 상반기 착공했으며 사실상 건설을 마쳤다. 하지만 장비 반입과 생산 개시가 계속해서 늦어졌다. AMD나 엔비디아 등 빅테크 기업으로부터 제품 계약을 따내 물량을 채우려고 했지만 전부 TSMC에 몰렸던 탓이다. 결국 작년으로 예정됐던 테일러 팹의 가동은 고객사 유치에 실패하면서 내년으로 연기됐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테일러 시에 대한 투자규모를 중장기적으로 440억달러로 증액하겠다고 2024년 4월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 말 비상 경영에 돌입한 삼성전자가 투자 규모를 다시 370억달러(약 51조원) 수준으로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천문학적 규모다.
수요 미스매치가 났는데 공장을 돌리면 고정비, 감가상각비 부담 등으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하지만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 47억4500만달러(약 6조9000억원)를 받기로 한 만큼 가동을 언제까지 미루기만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고객없이 감행한 투자가 엄청난 재무 리스크로 돌아왔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테슬라와의 이번 계약이 성사됐다.
물론 이번 계약물량은 테일러 팹의 가동률을 채우기에 한참 부족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핵심은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을 확보했다는 점에 있다.
테슬라가 위탁생산을 의뢰한 AI6 칩셋의 계약 기간은 2025년 7월부터 2033년 12월 31일까지 약 8.5년이다. 단순 계산했을 때 연간 약 2조7000억원의 안정적인 매출이 발생할 수 있다. 매출은 2027년부터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변동성이 큰 반도체 산업에서 귀중한 자산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설비투자 기계의 감가상각을 5년 주기로 진행한다. 삼성은 '자산을 경영진이 의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된 시점'을 기준으로 감가상각을 개시하고 있다. 가동하자마자 감가상각비 반영이 본격화되기 때문에 매출 인식과 감가상각비의 미스매치가 발행할 수 밖에 없단 뜻이다. 제품들의 마진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대규모 투자와 주주환원이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잉여현금흐름이 크게 위축된 상태다. 작년까지 5년 동안 연결 기준으로 총 258조원, 연평균 52조원을 CAPEX(자본적지출)에 썼다. 같은 기간 배당으로 나간 돈은 총 61조원, 연평균 12조원에 이른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잉여현금(배당금 지급 후 기준)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지난해 플러스로 전환하긴 했지만 운전자본투자 부담을 통제한 영향이 컸다. 올 3월 말 연결 잉여현금은 3조1000억원이다. 한때 연간 잉여현금이 26조원을 넘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족할 수준은 못된다.
특히 파운드리 사업부는 수년째 적자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시스템LSI와 합쳐 분기마다 2조원 안팎의 영업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비메모리 사업부 전체로 따지면 지난해 5조원의 적자를 냈는데, 올해는 적자폭이 더 확대될 것이란 예상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테슬라와의 계약은 파운드리사업 반등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테슬라에서 8년간 AI6를 탑재하게 될 자동차, 로봇 등의 정확한 출하량을 추산하긴 무리인 만큼 추가 수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게 중론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역시 SNS에서 계약 금액인 165억 달러가 "단지 최소치(bare minimum)"이며 "실제 생산량은 몇 배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