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03년 카드대란의 산물인 민간 배드뱅크 상록수가 사실상 청산 수순에 들어섰다. 정치권의 '약탈 금융' 지적에 카드사들이 장기연체채권 전액 매각을 발표하면서다. 이면에는 캠코의 물밑 작업과 추심 업계의 생존권 반발, 금융사들의 포용 및 상생금융 전략이 깔려 있다. 카드업권의 연체채권 매각 배경과 캠코에 미칠 재무적 영향, 대부업권으로 번질 파장을 짚어 본다.
상록수의 9개 사원사가 8450억원 규모 장기 연체 채권을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일괄 매각하기로 한 배경에는 대통령의 엄포만 있는 건 아니다. 23년간 고수해온 민간 배드뱅크 체제를 끝내고 캠코행을 택한 데에는 금융당국의 핵심 기조인 포용적 금융과 생산적 금융을 동시에 실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포용금융과 생산적 금융은 사실상 하나의 패키지 정책이라는 판단이다. 회수 가능성이 낮은 장기 부실채권에 투입되던 인적, 물적 자원을 AI 전환이나 신산업 투자 등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재배치하라는 메시지가 이번 매각 결정에 투영됐다는 분석이다.
금융당국 입장에서도 제도권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11만명의 장기 연체자를 발굴해 포용금융의 실효성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회수 인력 대신 AI에 투자하라"…생산적 금융으로의 자원 전환 지난 12일 상록수 사원 전원이 새도약기금 대상 채권을 일괄 매각하기로 결정하자 금융권에서는 이번 조치를 두고 "단순히 정부의 압박에 의한 수동적 결정만은 아니다"라는 반응이 나온다. 대통령의 '약탈적 금융' 경고가 촉매제가 된 건 맞지만 그 이면에는 상생금융과 포용금융을 실천해 미래 성장을 위한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계산도 깔렸다는 것이다.
실제 금융당국이 강조하는 생산적 금융과 포용적 금융은 사실상 하나의 세트 정책처럼 움직인다는 설명이다. 금융사가 회수 가능성이 희박한 장기 부실채권을 붙들고 인력과 자본을 소진하기보다는 이를 공공 영역으로 넘겨 채무자 재기를 돕고 확보된 여력을 AI 전환이나 신산업 투자 등 생산적인 영역으로 돌려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라는 것이 당국의 주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20년 넘은 채권에 추심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비용 대비 효율이 극히 낮다"며 "1·2금융권 입장에서는 연체자 채권을 탕감해 미래의 잠재 고객으로 복구시키고 내부 역량은 생산적 금융에 집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이익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번 매각에 적극적인 은행계 카드사들은 정부 기조에 발맞추는 동시에 상록수라는 해묵은 과제를 정리하며 포용금융의 선두주자라는 브랜딩 효과까지 누릴 수 있게 됐다.
◇캠코로 이관된 부실채권, 1년 내 자동 소각…금융당국은 사각지대 발굴 장기 연체 채권이 민간 추심업체가 아닌 캠코로 넘어간다는 점은 연체자들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캠코의 새도약기금은 수익 극대화가 목적인 민간 업체와 달리 취약차주의 재기 지원에 방점을 둔다.
캠코 관계자는 "국민 입장에서 부실채권이 민간에 비싸게 팔리는 것보다 캠코에 낮게 팔리는 것이 유리하다"며 "민간 추심업체에 채권은 수익을 내야 하는 돈줄이지만 캠코는 회수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 구조가 없고 오히려 신용정보사들에 과도한 추심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설명했다.
캠코가 채권을 낮은 가격에 인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회수율을 보수적으로 산정해 채무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시장 가격 자체가 낮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캠코로 이관된 채권은 즉시 추심이 중단되며 취약계층의 경우 일정 요건에 따라 1년 내 자동 소각되는 등 공익적 처리 절차를 밟게 된다.
금융위원회 또한 이번 상록수 청산을 통해 정책의 사각지대를 재점검하는 수확을 거뒀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상록수라는 해묵은 민간 배드뱅크에 남아 있던 장기 연체 채권 등 금융당국이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정밀하게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번 인수를 통해 캠코는 국가 차원의 취약차주 재기 지원 플랫폼로서의 존재감을 강화하게 됐다. 금융당국 역시 제도권 밖의 연체자들을 보호막 안으로 수용하는 정책적 명분을 확보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