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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차세대 지형도

아모레퍼시픽, 서민정 승계작업 속도 조절하나

자금줄 이니스프리, 지분율 18.2%→9.5%…공익법인 출연 이유는

고진영 기자  2023-06-05 16:01:18

편집자주

소유와 경영이 드물게 분리되는 국내에서 오너기업의 경영권은 왕권과 유사하게 대물림한다. 적통을 따지고 자격을 평가하며 종종 혈육간 분쟁을 피할 수 없다. 재계는 2022년 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승진과 함께 4대그룹이 모두 3세 체제로 접어들었다. 세대 교체의 끝물, 다음 막의 준비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주요기업 차기 경영권을 둘러싼 후계 구도를 THE CFO가 점검해 본다.
시간적으로 볼 때 아모레퍼시픽그룹은 후계구도를 다지기까지 꽤 여유가 있는 편이다. 서경배 회장이 만으로 이제 막 예순줄에 들어섰기 때문에 물러날 시기를 점치기 한참 이르다.

장녀 서민정 아모레퍼시픽 담당의 최근 지분 변화에서도 이런 판단이 감지된다. 지난해 보유 계열사 지분을 연이어 소각했는데 최근엔 승계재원인 이니스프리 주식 반절을 그룹 재단에 넘겼다.

◇서민정 담당, 이니스프리 지분율 절반 '싹뚝'

서민정 아모레퍼시픽 럭셔리 브랜드 Division AP팀 담당은 이달 이니스프리 주식 2만3222주(9.5%)를 서경배과학재단에 기부금으로 출연했다. 애초 서 담당이 4만4450주(18.18%)를 보유 중이었으니 절반 이상을 내어준 셈이다. 기부 이후 지분율은 8.68%(2만1228주)로 줄었다.

증여한 주식의 가액을 따지면 272억원에 이른다. 비상장주식이기 때문에 내부 산정을 통해 가치평가가 이뤄졌다. 2022년 말 기준 서경배과학재단 순자산(5억원)의 5436%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일각에선 이번 출연을 두고 승계와 연계지어 해석하고 있다. 비영리법인의 경우 일정 규모에 한해 증여세가 면제되기 때문에 승계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짐작이다. 상속세및증여세법(상증법)에 따르면 공익법인의 기부자에게는 '과세가액 불산입'이 허용된다.

실제로 스웨덴의 거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 가문은 '발렌베리 재단'이 지배구조 최상단에서 그룹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5대에 걸쳐 한 가문이 그룹을 소유하되, 경영은 철저히 분리된 형태다. 삼성그룹 역시 한동안 벤치마킹을 위해 발렌베리 구조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사실상 공익법인을 통한 지배가 불가능하다. 상증법이 주는 혜택에 제한이 있을 뿐더러 엄격한 조건까지 동반되기 때문이다. 상증법은 공익법인에 증여세를 면제해 주지만 출연받은 주식이 내국법인의 지분 10%를 초과할 때는 그렇지 않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과 특수관계에 있는 공익법인의 경우 제한이 5%로 더 엄격해진다.

또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은 그룹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 역시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합병 등 중요 안건에 대해선 예외가 있으나 운신의 폭이 여전히 좁다. 주식을 일정 비율 이상 보유하기도 힘들고, 갖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의 경우 2013년 상호출자제한집단에 포함됐다가 2016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 기준을 자산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4년 만에 다시 빠졌다. 그러나 현재 자산이 8조원을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승계를 위한 장기적 계책으로 공익법인을 염두에 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낮다.

◇서경배과학재단, 수증주식 지속 처분…지주사 지분율 미미

물론 대기업집단이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소유 재단으로 하여금 계열사 지분을 5% 미만으로 보유토록 하는 케이스가 심심찮게 있다. 하지만 이런 목적이라면 서 담당이 이미 품에 있던 지분을 굳이 재단에 넘길 이유가 없다. 실제로 서경배과학재단은 증여받은 계열사 주식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팔아 운영자금으로 쓰고 있다.

서경배과학재단은 서 회장이 2016년 8월 세운 공익법인이다. '생명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초연구 육성 및 연구활동 지원사업'을 목적사업으로 하고 있다. 설립 당시 서 회장이 아모레퍼시픽 우선주를 매각해 3000억원의 사재를 출연했으며 출연금을 추후 1조원 수준으로 늘릴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뒤 서 회장은 작년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아모레퍼시픽(9만주)과 지주사인 아모레퍼시픽그룹(아모레G, 우선주 25만주) 주식을 추가로 기부했다. 액수로는 각각 약 122억원, 47억원으로 총 168억원 규모다. 다만 재단이 이 주식을 운영자금 사용목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매도했기 때문에 현재 아모레퍼시픽 지분은 0%, 아모레G 지분은 우선주 기준 1.56%(보통주 포함 0.22%)만 남아 있다. 서 담당이 출연한 이니스프리 지분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처분될 가능성이 높다.


◇자금줄 약해졌지만…강점은 '시간'

이니스프리는 서민정 담당의 승계를 위한 재원으로 꼽히는 곳이다. 2015년 서경배 회장이 서 담당에게 이니스프리 주식 전량을 증여했다. 그 후 지난해까지 8년간 서민정 담당이 배당으로 가져간 돈은 약 508억원으로 계산된다.


이밖에도 서 담당은 서 회장이 2012년 증여한 에뛰드(19.5%)와 에스쁘아 주식(19.5%)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회사가 지난해 재무개선을 위한 감자를 실시하면서 서 담당의 지분이 모두 소각됐다. 따라서 그에게 배당금을 밀어줄 비상장 계열사가 이니스프리만 남아 있다. 이제 이니스프리 지분율도 줄어든 만큼 자금줄이 또 한 번 타격을 입은 셈이다.

상황상 아모레퍼시픽그룹이 승계에 속도를 내기 보다는 계열사 재무개선, 대내외적 명분 확보를 우선 순위로 두고 숨 고르기를 하는 모습이다. 지난달 서경배 회장이 차녀 서호정 씨에게 아모레G 보통주와 전환우선주를 합쳐 2.63%에 상당하는 주식을 증여하긴 했으나 유의미하게 보기엔 규모가 작다.

서 회장이 보유한 아모레G 지분은 보통주 기준 52.96%, 우선주 포함 47.14%에 달한다. 서민정 담당의 경우 동생보다 소폭 많은 2.66%(우선주 포함)를 보유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분 측면에서 아직 승계는 초입 단계지만 서 회장이 1963년생, 만 60세로 아직 젊다는 점에서 촉박하진 않다"며 "서 담당에게 추가로 증여가 이뤄지더라도 당분간은 소규모에 그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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