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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전략 '지체'를 끊어내려면

이민호 기자  2024-02-20 07:09:16
지주회사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현금 재분배다. 현금 우위 계열사에서 열위 계열사로 현금을 이동시켜 그룹 전반에 현금이 효과적으로 쓰이도록 한다. 지주사로부터 유상증자나 차입으로 조달한 현금은 열위 계열사에 버팀목이 된다.

지주사가 이 기능을 핵심 사업회사에 전가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주사 체제에서 핵심 사업회사는 이른바 캐시카우 자회사로 배당금과 상표권 사용료 등을 지급하고 지주사는 이를 현금 재분배를 위한 재원으로 쓴다. 하지만 핵심 사업회사가 보유한 현금을 지주사에 올려보내지 않고 직접 현금 열위 계열사에 이동시키면서 지주사의 기능을 전가받는다. 지분관계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유상증자보다 대여의 형태가 많다.

세아상역의 세아STX엔테크에 대한 569억원 대여(2024년 2월 1일 잔액 기준)나 귀뚜라미의 귀뚜라미홈시스에 대한 56억원 대여(2022년말 잔액 기준)가 대표적이다. 모두 그룹 내 핵심 사업회사가 직접적인 지분관계가 없는 계열사에 대여금을 제공한 사례다.

하지만 이는 지주사 체제의 본질을 흐린다. 지주사가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지배구조상 최정점이라는 지위만 갖는 데 그치는 탓이다. 한발 더 나아가 핵심 사업회사에는 배임의 문제가 제기될 우려가 있다. 그룹 계열사 살리기가 본질가치 제고에 기여했는지 여부와 대여금리가 적정했는지 여부 등이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현금 재분배 기능의 전가가 가능한 가장 큰 원인은 지주사와 핵심 사업회사에 독립된 재무전략이 부재한 탓이다. 지주사와 핵심 사업회사의 재무전략이 사실상 한몸처럼 움직이다보니 그룹 전반의 이익을 위해 사업회사의 현금에 손을 댄다. 지배구조상으로는 지주사 체제를 갖췄더라도 재무전략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른바 지체 현상이다.

지체를 해소하려면 근본적으로 핵심 사업회사에 이사회 중심의 경영체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룹 오너나 지주사의 이익보다 본사의 이익을 우선하는 판단이 필요하다.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자금을 지원하더라도 규모와 기간, 금리를 따져볼 수 있는 일종의 거름망을 한겹 더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이와 더불어 핵심 사업회사에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별도로 선임하고 CFO를 이사회에 참여시켜야 한다. 현금 재분배 기능이 전가되는 대부분 사례에서 지주사와 핵심 사업회사 중 한곳에만 CFO를 둬 재무전략을 통합하고 있거나 CFO를 그룹 차원에서 선임해 그룹 전반의 이익을 위한 결정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 CFO에게 지우는 마땅한 책임이 지주사 체제에서의 재무전략 지체를 해결할 실마리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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