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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건 관련기사
회전문 앞에 선 SK
1985년 인텔에서 앤디 그로브 사장이 고든 무어 회장과 마주 앉았다. 회사를 일군 메모리사업이 일본에 밀려 시들어가고 있었다. 창밖의 놀이공원 대관람차를 바라보던 그로브가 묻는다. "만약 우리가 쫓겨나고 새 CEO가 온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무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떼겠지." 둘은 인텔을 탄생시킨 메모리사업을 도려내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승부를 걸었다. 그로브는 비즈니스 펀더멘털이 통째로 바뀐 이 순간을 '전략적 변곡점'이라 불렀다. 완벽히 통하던 성공 공식이 수명을 다하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점이다. 최근 SK그룹의 SK실트론 매각에 제동이 걸렸다. 두산그룹에 지분 70.6%를 5조원 받고 넘기기로 한 계약이 서명만 남은 참이었다. 다 판 것과 다름없었지만 SK 측이 재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
고진영 기자
삼성전자, 2명의 CFO가 상징하는 것
최근 삼성전자의 성과급 이슈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사람들은 삼성전자를 하나의 회사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여러 산업과 사업 모델이 결합된 거대한 연합체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CFO 체계다. 일반 기업에는 CFO가 한 명이다. 회사의 돈과 후선 업무를 총괄하는 사람은 한 명이면 된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다르다. 전사 경영지원담당(박순철 부사장)이 있고, 별도로 DS부문 경영지원담당(김홍경 부사장)이 있다. 사실상 두 명의 CFO가 존재한다. 이는 단순한 조직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스마트폰과 TV, 가전을 담당하는 DX부문은 전형적인 B2C 기업에 가깝다. 반면 DS부문은 메모리, 시스템LSI, 파운드리 사업을 영위하는 B2B 성격을 가졌다. 소비자 수요와 브랜드 경쟁력이 중요한 사업과 수십조원 규모의 설비투자와 기술력이 중요한 사...
원충희 서치앤리서치(SR)본부 부장
신한금융의 환리스크 관리
올 들어 금융지주사들의 건전성은 다시 한 번 '환율'이라는 변수 앞에 섰다. 1분기 말 기준 외환 요인으로 인한 보통주자본(CET1)비율 하락 폭은 하나금융이 -18bp, 신한금융 -11bp, KB금융 -15bp, 우리금융 -10bp다.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지만 하락 폭은 제각각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외화자산 규모만 보면 신한금융이 약 137조원으로 가장 크다. 그렇다면 환율 변동의 충격도 가장 크게 받아야 자연스럽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신한금융이 오히려 덜 흔들렸다. 이 차이는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보다 '어떻게 갖고 있느냐'에서 나온다. 환율이 금융지주사에 미치는 영향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해외 자회사 가치가 환율에 따라 바뀌는 부분이다. 원화가 약해지면 해외 자산 가치는 올라가며 이 변화는 자본의 일부로 반영돼 CET1비율을 흔...
사다리를 걷어차버린다면
주가는 오르는데 기업은 돈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현재 한국 자본시장이 내는 기묘한 이상 신호다. 금융당국은 일반주주 보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대규모 유상증자에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중복상장에도 사실상 제동을 걸겠다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대주주와 경영진 판단에 따라 기존 주주가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구조는 더는 방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쪽에서는 밸류업과 증시 부양을 외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의 핵심 자금조달 경로를 잇따라 좁히고 있다. 시장에는 주가를 끌어올리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기업에는 자금은 다른 방식으로 알아서 마련하라는 주문을 내리는 셈이다. 한화솔루션 사례는 이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회사는 재무구조 개선과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해 2조4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했다. 금융감독원은 증...
최명용 부국장 겸 SR본부장
AI는 자산일까 부채일까
"AI는 안 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편하게 할 수 있는 투자도 아니다." 회계법인 출신의 기업 재무 담당자는 자신의 상관인 CFO의 얘기를 이렇게 한줄로 요약했다. 요즘 기업들 사이에서 AI는 가장 뜨거운 이슈지만 재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는 의미다. 열광의 이면에 숨겨진 '불확실성'이라는 비용을 누구보다 먼저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AI 투자는 구조부터 단순하지 않다. 막대한 하드웨어 비용과 라이선스 비용이 먼저 집행되고 수익 및 비용 절감 효과는 뒤늦게 따라온다.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 겉으로는 CAPEX처럼 보여지나 실제로는 벤처 투자에 가깝다. 언제, 어떻게 회수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투자다. 문제는 이 투자에서 발생하는 리스크의 성격이다. 잘못된 데이터로 학습된 모델, 설명하기 어려운 의사결정, 외부로 흘러나간 정보는 어느 순...
CJ와 콜마, 주가와 오너십
주가는 오르면 좋은 것일까. 대부분의 투자자에게는 그렇다. 하지만 어떤 오너에게는 주가 상승이 오히려 부담이 되기도 한다. 최근 콜마그룹과 CJ그룹을 둘러싼 상황은 이 질문에 정반대의 답을 보여준다. 콜마그룹이 지주사 콜마홀딩스의 자기주식 매입을 검토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크게 눈길이 가지 않았다. 밸류업 이슈가 한창인 시기, 자사주 매입은 흔한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니 얘기가 달랐다. 콜마 오너가에게 주가는 단순한 지표가 아니라 생존 문제였다. 오너 일가는 지주사 지분을 담보로 상당한 대출을 일으킨 상태다. 윤상현 부회장과 윤여원 사장 모두 보유 지분의 상당분을 금융권에 맡겼다. 일부 담보의 유지비율은 170% 수준으로, 주가 기준 1만1200~1만1400원대다. 문제는 주가가 이미 1만원 미만이라는 점이다. 이 구간에서는 추...
캐즘 한복판에 선 삼성SDI CFO
김종성 전 삼성SDI 경영지원실장(CFO)의 건배사는 '배터리'였다. "배가 터지게 이익을 내자"는 다짐이다. 2차전지 호황기에는 유쾌한 구호였지만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현재, 그 말은 더 절실한 각오로 들린다. 삼성SDI는 전기차 캐즘의 한복판에서 거센 파도를 건너는 중이다. 수요 둔화와 가격 경쟁, 정책 불확실성이 겹친 불황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일시적 조정이라던 캐즘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터널이 됐다. 지난해 삼성SDI는 1조7224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외형 성장 기대가 컸던 시점이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다만 위기는 방향을 다시 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회사가 5년 만에 CFO를 교체한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재무 전략을 재설계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전임 체제에서 2조원 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하고 삼성디스플레이 지분 매각을...
오너의 트라우마와 재무전략
"그 회사 오너가 예전에 OO은행에 엄청 시달렸거든. 지금도 회사 CFO가 은행 대출 받자고 하면 학을 떼." 한때는 은행 간부로, 지금은 자기 사업을 하는 한 지인이 꺼낸 말이다. 특정 기업을 콕 집어 언급하진 않았지만 기업금융이나 IB 분야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다. 숫자와 조건으로 설명되는 기업의 자금조달 뒤에는, 이처럼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특히 창업주가 겪은 자금 압박의 경험은 시간이 흘러도 기업의 재무 의사결정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스마일게이트와 셀트리온은 이 같은 자금조달 트라우마가 기업 전략으로 구조화된 대표적 사례다. 스마일게이트는 대표 IP인 '크로스파이어' 출시 후 한때 곳간이 바닥난 적이 있다. 당시 MVP창업투자(현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로부터 투자를 유치했으나 얼마 안 ...
이사회 참호를 어떻게 깰까
참호구축, 부패한 이너써클, 골동품. 금융지주 이사회를 향한 금융당국과 정치권의 비판 수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금융지주 회장과 인연이 있거나 친한 인사들로 참호를 구축했다는 비판에서 시작해 이너써클이 부패했다고 비난했다. 6년이 지나면 골동품이 된다고 사외이사들이 경영진과 이해 관계가 같아지는 모습을 비판했다. 금감원은 특별 점검을 하고 지배구조 TF를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금융사들도 할 말은 있다. 금융지주 이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규제와 감시 속에서 일을 한다. 한달에 몇차례씩 회의를 한다. 복잡한 금융 용어와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정책들에 회의 내용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조금만 잘못된 결정을 내려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현재는 옳았던 결정이 먼 미래엔 잘못된 결정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정권이 바뀌면 그때 왜 그런 결정을 했...
최명용 SR본부장 겸 부국장
롯데의 솔직한 선택
지주회사 CEO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룹 전략통이거나 오너의 신임을 받는 관리자형 혹은 그룹의 캐시카우를 쥐어본 핵심 계열사 사장이다. LG의 권봉석 부회장, 롯데의 황각규 전 부회장을 생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지주사 CFO는 중요하지만 조연에 가깝다. 숫자를 관리하는 역할이지 비전을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CFO가 CEO로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지주사라면 더 그렇다. GS 홍순기 부회장은 이례적인 케이스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이런 공식은 종종 깨진다. 시장의 질문이 "다음 비전이 무엇인가"에서 "이 회사 괜찮은 건가"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필요한 CEO는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설명하는 사람이다. 차입 만기는 언제고, 우발채무는 어디에 있고, 가용현금이 얼마인지 등 이런 질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