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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걷어차버린다면

최명용 부국장 겸 SR본부장  2026-04-30 08:15:18
주가는 오르는데 기업은 돈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현재 한국 자본시장이 내는 기묘한 이상 신호다.

금융당국은 일반주주 보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대규모 유상증자에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중복상장에도 사실상 제동을 걸겠다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대주주와 경영진 판단에 따라 기존 주주가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구조는 더는 방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쪽에서는 밸류업과 증시 부양을 외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기업의 핵심 자금조달 경로를 잇따라 좁히고 있다. 시장에는 주가를 끌어올리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기업에는 자금은 다른 방식으로 알아서 마련하라는 주문을 내리는 셈이다.

한화솔루션 사례는 이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회사는 재무구조 개선과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해 2조4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했다. 금융감독원은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구했다. 형식상 이유는 투자 판단에 필요한 기재 보완이다.

하지만 시장이 읽은 신호는 더 직접적이다. 유상증자가 정말 불가피한지 기존 주주가 왜 희석을 감내해야 하는지 더 엄격하게 입증하라는 뜻이다. 결국 한화솔루션은 유상증자 규모를 절반으로 줄였다.

중복상장 규제도 같은 맥락에 있다. 모회사가 상장된 상태에서 자회사를 다시 상장시키는 구조는 한국 증시의 고질적 할인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자회사 가치는 따로 인정받고 모회사 주주는 할인만 떠안는 구조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거는 것은 일반주주 보호 차원에서 충분히 명분이 있다.

하지만 자회사 상장이 언제나 편법이었던 것은 아니다. 신사업 자금을 끌어오고, 사업부의 독립 가치를 평가받고 초기 투자자에게 회수 통로를 열어주는 기능도 해왔다. 이 경로를 일률적으로 막으면 기업은 차입 부담을 더 떠안거나 투자 시점을 늦출 수밖에 없다.

배터리, 반도체, 방산, 에너지, 바이오 산업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가늠지을 신사업들이다. 모두 모두 수천억원 많게는 수조원 단위 자금이 선투입돼야 경쟁이 가능하다. 기술만으로 버티기 어려운 산업이다. 자금 동원력이 곧 경쟁력인 산업들이다.

유상증자는 어렵고 자회사 상장은 막히고 차입은 부담스럽다면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투자를 늦추는 것이다. 시장이 주가를 방어하는 데는 성공할지 몰라도 기업의 성장 속도까지 끌어올리기는 어려워진다.

자본시장은 주가를 매기는 곳인 동시에 미래 자금을 끌어오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자본시장은 전자에는 민감하고 후자에는 지나치게 인색하다. 이익이 나면 더 나누라고 압박하고 주가를 희석시키는 조달은 더 엄격히 막는다. 그 결과 기업은 실탄을 쌓기 어려워지고 장기 투자는 뒤로 밀린다.

나쁜 유상증자도 있고 나쁜 중복 상장도 있다. 하지만 모든 유상증자가 나쁜 것은 아니고 모든 자회사 상장이 기존 주주에 대한 배신인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원칙 그 자체보다 정교한 기준이다. 어떤 증자가 기존 주주를 희생시키는지 어떤 상장이 성장 재원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를 가르는 세밀한 판단이 필요하다.

원칙은 세우되 예외도 설계해야 한다. 원칙만 있고 예외가 없으면 제도는 시장을 바로 세우는 게 아니라 시장을 얼어붙게 만든다. 주가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기업이 올라설 투자 사다리까지 걷어차서는 안 된다. 사다리를 치운 시장은 결국 더 높이 오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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