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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문 앞에 선 SK

고진영 기자  2026-06-08 07:55:22
1985년 인텔에서 앤디 그로브 사장이 고든 무어 회장과 마주 앉았다. 회사를 일군 메모리사업이 일본에 밀려 시들어가고 있었다.

창밖의 놀이공원 대관람차를 바라보던 그로브가 묻는다. "만약 우리가 쫓겨나고 새 CEO가 온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무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떼겠지."

둘은 인텔을 탄생시킨 메모리사업을 도려내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승부를 걸었다. 그로브는 비즈니스 펀더멘털이 통째로 바뀐 이 순간을 '전략적 변곡점'이라 불렀다. 완벽히 통하던 성공 공식이 수명을 다하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점이다.

최근 SK그룹의 SK실트론 매각에 제동이 걸렸다. 두산그룹에 지분 70.6%를 5조원 받고 넘기기로 한 계약이 서명만 남은 참이었다. 다 판 것과 다름없었지만 SK 측이 재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년간 SK그룹은 수비에 전념해왔다. 계열사를 219개에서 151개로 통폐합하고, 13조원어치 자산을 내다 팔았다. 하지만 실트론 매각을 철회한다면 방어에서 공격으로, 리밸런싱에서 소재 내재화로의 태세 전환을 뜻한다.

이유는 숫자에 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출혈경쟁 한복판이다. 올해 TSMC는 520억~560억달러, 삼성전자가 반도체에만 약 400억달러, 마이크론은 250억달러 넘게 쏟아붓기로 했다. 작년보다 20~40% 불어났다. 투자 시계를 한 박자만 늦추기도 불안한 시기, SK의 막판 선회는 놀랍지 않아 보인다.

SK실트론이 만드는 반도체용 웨이퍼는 한때 떼어팔기 좋은 범용 매물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HBM(고대역폭메모리) 시대가 열리자 위상이 달라졌다. 미세한 웨이퍼 두께 편차가 수율을 좌우하는 데다, 글로벌 시장은 5개사 정도가 과점하는 닫힌 생태계다. 실트론을 넘기면 SK는 그룹의 핵심 소재를 이 좁은 외부 공급망에 기대야 한다.

물론 판을 엎을 경우 후폭풍은 피할 수 없다. 인수전을 치른 두산, 금융권과 자본시장의 신뢰 하락이 치러야 할 값이다. 매각을 백지화할지에 대해 SK 측이 ‘정해진 바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 중인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그로브가 던졌던 질문은 이른바 ‘회전문 테스트’로 유명해졌다. 지난 선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 매몰비용을 전부 버리고 합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한 사고법이다. SK에도 같은 화두를 던질 수 있다. SK가 털어내야 할 미련은 실트론일까, 3년 전 짜둔 매각계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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