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은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 그룹이다. 지금의 한화그룹을 만든 수많은 순간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의 한 수'로 꼽히는 건 2002년 이뤄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인수다.
한화그룹은 외환위기 여파로 위기에 처한 대한생명을 우여곡절 끝에 인수했다. 인수를 결정했을 당시는 물론 인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난항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룹의 최고 효자로 거듭났다. 화학과 방산, 건설과 유통 등 다른 사업들이 수도 없이 부침을 겪는 사이 한화생명만큼은 굳건했다. 인수 이후 23년 동안 단 한 번도 연간 순손실을 낸 적이 없다.
◇23년간 누적 순이익 9조원대 인수됐던 당시 대한생명은 누적 결손금만 2조원을 훌쩍 넘는 회사였다. 부실회사로 지정돼 3조50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상황이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도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는 특혜라고 공격했다. 계열사 사장단 사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김승연 회장은 '100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라며 인수를 결단했다.
인수 이후에도 보험업에 익숙하지 않은 한화그룹이 자산 규모 23조원, 업계 순위 2~3위의 대한생명을 순탄하게 끌고갈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김 회장은 2002년 말 대한생명 인수에 성공한 뒤 기존에 맡고 있던 굵직굵직한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모두 내려놓고 2년 동안 대한생명의 경영에만 매달렸다.
이후 한화생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업의 성패는 숫자가 말해준다. 한화그룹 인수 뒤 한화생명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인수 4년 만인 2006년 한화생명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연간 수입보험료 10조원을 돌파했다. 인수됐을 당시 2조3000억원이던 누적 결손금은 2008년 모두 털어냈다.
2010년엔 기업공개(IPO)까지 무사히 마무리했다. 2002년 매각 주간사인 메릴린치가 평가한 한화생명의 기업가치는 1조6150억원이었는데 8년이 지난 2010년 3월 상장했을 당시의 시가총액 규모는 7조6000억원대에 이르렀다.
그룹 차원의 전폭적 지지로 매년 외형도 크게 확장했다. 2002년 말 29조598억원이던 자산 규모가 두 배로 늘어 60조원을 넘긴 게 2010년이다. 지난해 말 기준 자산 규모는 122조원에 이른다. 최근 2년 잠시 주춤하긴 하지만 2022년까지만 해도 3위 교보생명과의 자산 격차가 18조원에 이르렀다.
수익은 말할 것도 없다. 2022년 이후 한화생명은 단 한 번도 연간 기준(별도) 순손실을 낸 적이 없다.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에도 700억원대의 순이익을 냈으며 이듬해엔 바로 3000억원대 순이익을 회복했다. 지난해까지 23년간 한화생명이 벌어다준 순이익을 모두 더하면 9조원대에 이른다. 한화생명 지분 51%에 대한 대가로 8236억원을 지불했는데 10배가 훌쩍 넘는다.
◇금융 계열사 지주사 역할, 승계 핵심 축 한화그룹이 지금처럼 화학과 방산, 금융을 삼대 축으로 삼는 안정적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던 배경에도 한화생명이 있다. 기존에도 금융 계열사를 여럿 두고 있었지만 규모가 워낙 작아 존재감이 미미했다.
한화그룹은 한화생명 인수 이후 주력사업이던 화학부문은 내실화에 집중하고 보험과 증권을 비롯한 금융부문을 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워냈다. 한화생명과 함께 신동아화재(현 한화손해보험)까지 인수하면서 한화그룹은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라는 안정적 보험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한화생명은 한화그룹 금융 계열사들의 지배구조 정점에 위치해 금융 지주사 역할도 하고 있다. 일찌감치 한화생명을 중심에 둔 지배구조가 완성됐다. 지난해엔 마지막으로 한화저축은행까지 한화생명 아래로 편입되면서 한화그룹의 모든 금융 계열사들이 한화생명 아래 놓이게 됐다.
승계의 한 축도 담당하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차남인 김동원 사장이 10년째 한화생명에서 근무하고 있다. 현재 한화그룹 안팎에서는 장남이 방산·우주·화학, 차남이 금융, 삼남이 유통·호텔·로봇 사업을 나눠 경영할 것이란 관측이 거의 공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삼형제의 영역이 겹치지 않으면서도, 규모 역시 삼형제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배분돼야 하는데 사실상 한화생명 없이는 계산이 쉽지 않다. 한화생명 규모가 워낙 크고 또 수익 역시 탄탄하게 내고 있어 삼형제의 역할 혹은 영역 분담이 한층 수월할 수 있었다.
단순히 '돈만 잘 버는 곳'이 아니다. 한화생명은 그룹 내 굵직굵직한 경영인이 거쳐가는 곳이자 계열사 대표이사를 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한화손해보험을 이끌고 있는 나채범 대표가 한화생명 출신이다. 한화그룹은 고위 임원의 계열사 이동이 잦은 편인데 핵심 인물 가운데 한화생명을 거친 인물이 많다. 한화생명을 이끌고 있는 여승주 부회장은 한화그룹에서 유일하게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전문경영인 부회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