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실적을 기록 중인 한미반도체가 현금흐름에선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용 TC본더 시장을 독주하면서도 사업으로 버는 돈이 부족해 기존 현금을 소진 중이다. 1000억원을 넘겼던 금고가 빠르게 줄었다.
다만 최근의 현금흐름 약화는 수익구조 문제가 아닌 과도기적 진통으로 풀이된다. 매출 규모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납품 전 단계에 묶여 있는 현금도 늘었다. 일시적으론 부담이지만 본격적 성장의 전조라고 볼 수 있다.
올 6월 말 한미반도체의 연결 현금성자산은 373억원을 기록했다. 애초 한미반도체는 2022년 이후 1000억원대 보유현금을 유지해왔다. 이듬해 1800억원 수준으로 늘어나기도 했는데 작년 말 1040억원 수준으로 축소, 올해는 600억원 넘게 더 줄어들었다.
현금창출력과는 정반대 흐름이다. 한미반도체는 2023년 430억원이었던 연간 EBITDA(상각 전 영업이익)가 2024년 약 2650억원으로 점프했다. 올 상반기엔 1617억원을 기록, 전년 대비 거의 두 배로 더 확대됐다. HBM3E 12단 생산용 TC본더 시장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면서 납품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금창출력이 좋아졌는데도 보유현금이 되려 감소한 까닭은 운전자본에 있다. 한미반도체는 운전자본 관련 자산 부채의 변동으로 상반기에 약 1218억 원의 현금 순유출이 발생했다. 이 기간 매출채권이 718억원, 재고자산은 434억원 많아진 탓이다.
운전자본 부담은 현금 부족으로 이어졌다. 한미반도체는 올 상반기 영업현금흐름이 마이너스(-)를 나타냈으며 잉여현금에서도 순유출이 발생했다. 6월 말 잉여현금은 연결 기준으로 -1051억원이다.
우선 매출채권 증가는 제품 판매가 늘어남에 따라 외상매출도 같이 증가한 결과로 해석된다. HBM 장비 수요 확대로 납품이 늘었지만 고객사 결제 조건에 따라 현금화가 늦어졌다.
구체적으로 한미반도체의 판매구조를 보면 내수는 현금과 전자어음이 7대 3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어음의 경우 최대 90일 이내 회수 가능한 채권이고 현금은 통상 1개월 내에 지급한다.
또 수출의 경우 해외지사나 에이전트가 고객의 장비 투자계획이나 생산물량 현황을 모니터링해 수요를 포착하고 있다. 이 정보를 토대로 프레젠테이션이나 기술협의를 진행한다. 이후 사양을 협의해 견적을 제시하고 발주(PO)로 이어지는 구조다.
결제는 L/C(신용장 거래)보다 T/T(전신환 송금) 방식이 표준으로 쓰이고 있다. 쉽게 말해 계좌이체다. 회사 측은 “고객들이 사전 입회 검사(Buy-Off) 절차를 통회 제품을 확인하고 대금을 지급하는데, 이런 복잡한 기준을 L/C에 정량적인 검사조건으로 명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T/T 방식의 대금 회수는 발주 30일 뒤에 30%를, 납품 30일 전에 60%를 받고 있다. 따라서 제작단계의 자금부담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지만 마지막 10%는 검수 이후 30일이 지나서야 지급되기 때문에 외상 구간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수익 인식과 현금 회수 사이에 1~3개월의 시차가 발생하면서 운전자본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또 원재료 확보와 생산 재공품을 늘린 점이 재고자산이 늘어난 원인으로 작용했다. 고객사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안전재고 수준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현금흐름에 도움이 되는 매입채무는 77억원 정도 줄면서 영업현금에 부담을 줬다.
한미반도체는 올해 십여년만에 처음으로 단기차입을 쓰기도 하는 등 운전자본 부담을 관리하고 있다. 상반기에 일반자금대출, 무역금융대출로 신한은행에서 250억원을 단기로 빌렸다. 추가 조달 여력도 충분히 남아 있다. 그간 레버리지 활용에 보수적 태도를 고수해왔기 때문에 상반기 기준 차입금보다 현금이 90억원 정도 많은 순현금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한미반도체의 현금 감소는 공격적으로 몸집을 확대하려는 신호”라며 “구조상 앞으로도 현금흐름에 변동성은 계속될 수 있지만 매출채권이 회수되면서 다시 개선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