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최고경영자)의 방한이 불러온 AI(인공지능) 수혜주 랠리에서 삼성전기는 특히 눈에 띄는 기업이다. 대다수 주가가 협력 기대를 바탕으로 움직였다면, 삼성전기는 이미 손에 주문서를 쥐고 있다. 최근 체결한 조단위 부품계약이다.
계약이 실제 손익계산서에 반영되기까진 시간이 소요되지만 시차를 버틸 체력은 충분해 보인다. 투자를 확대하면서도 순현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기대감 아닌 진짜…'실리콘 커패시터' 공급계약 삼성전기는 1조5570억원 규모의 ‘실리콘 커패시터(Silicon Capacitor)’를 공급하기로 했다고 지난달 밝혔다. 지난해 연결 매출(11조3145억원)의 14%에 달하는 대규모 딜이다. 내년 1월부터 2028년 12월까지 납품하고 이에 따라 실적에 순차 반영한다.
실리콘 커패시터는 반도체 패키지에서 전력 공급을 안정화하는 부품이다. 칩의 소비전력이 커질수록 실리콘 커패시터 탑재량과 단가도 함께 오른다.
계약 상대방은 비밀유지를 이유로 공시가 유보됐지만, 업계에선 구글의 차세대 AI 가속기(TPU v8e)에 쓰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삼성전기가 단순 부품 공급에 그치지 않고 AI 반도체패키징 공급망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AI칩은 연산 칩과 HBM(고대역폭메모리)을 한 묶음으로 붙이는 고난도 패키징이 필요한데 TSMC의 ‘CoWoS’에 주문이 몰리고 있다.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 HBM 수요가 폭증하면서 적체가 커졌고 빅테크들이 다른 패키징 방식과 공급선을 찾는 과정에서 삼성전기 부품이 채택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수주가 매출 숫자 이상의 레퍼런스 가치를 갖는 배경이다.
◇'AI 풀라인업'…패키지기판 조기 양산 최근 계약을 단발성 호재로 보기 어려운 또다른 이유는 실리콘 커패시터가 삼성전기 포트폴리오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삼성전기는 MLCC(적층세라믹콘덴서)와 패키지기판(FC-BGA), 피지컬 AI 카메라모듈, 유리기판 등의 AI 부품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범용 MLCC는 이미 유통망에서 판가 인상이 시작됐다. 패키지기판도 칩이 커지고 기판 층수가 높아지는 '대면적·고다층화' 흐름을 타고 있다. 삼성전기는 하반기로 예정됐던 물량을 2분기부터 앞당겨 양산하면서 사실상 풀가동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가 AI 반도체 패키징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턴키로 공급하는 구도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부문별 실적을 살피면 변화는 더 또렷해진다. 삼성전기의 1분기 연결 매출은 3조2091억원이다. 이 중 컴포넌트 부문이 1조4085억원으로 43.9%를 차지해 가장 컸다. 패키지솔루션은 7250억원(22.6%), 카메라모듈 중심의 광학솔루션은 1조756억원(33.5%)을 기록했다.
한때 실적을 좌우하던 광학 의존도가 낮아진 반면 실리콘 커패시터와 MLCC를 품은 컴포넌트, 패키지솔루션이 성장축으로 올라선 모습이다. 수익성도 따라붙고 있다. 영업이익률이 2024년 7.1%에서 2025년 8.1%로 높아졌고, 올해는 두 자릿수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탄탄한 순현금 체력…투자 여력 충분 재무제표에서도 성장을 위한 전략 전환이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2025년 매출이 1년 전보다 9.9%, 영업이익(9133억원)은 24.3% 늘었지만 현금흐름상 설비투자 부담은 더 빠르게 커졌다.
지난해 삼성전기의 순영업활동현금흐름(NCF)은 1조4057억원으로 전년 대비 5.5% 증가에 머물렀다. 운전자본투자가 3193억원에서 7075억원으로 점프한 탓이다. 매출채권 회수기간이 45일에서 52일로 길어지면서 현금전환 속도가 늦어졌다. 하지만 재고 회전기간이 오히려 77.5일에서 75.2일로 짧아진 점을 감안하면 대형 고객사향 매출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외상 비중이 커진 것으로 짐작된다.
더 큰 변화는 설비투자다. 삼성전기의 CAPEX(유무형 자산취득) 규모는 2024년 8266억원에서 지난해 1조2463억원으로 50.8% 증가했다. 대부분 생산능력 증대에 투입됐으며 컴포넌트 부문에만 7200억원 이상 들어갔다. 벌어들인 현금을 컴포넌트 쪽으로 집중 배치했다는 뜻이다.
올해 역시 투자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1분기 시설투자 2039억원 가운데 1546억원을 컴포넌트 증설에 쏟았다. AI 관련 납품이 증가하면 투자가 더 불어나거나 대금회수까지 자금이 묶일 수 있지만 순현금 체력이 뒤를 받치고 있다.
1분기 말 삼성전기의 현금성자산은 3조2433억원으로 총차입금(2조7347억원)을 5000억원 넘게 웃돌았다. 차입은 대부분 단기 대출인데, 현금창출력과 비교해 이자 부담은 크지 않다. 추후 추가적인 유동성 지출이 필요해도 감당할 여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회사 측은 “시장지배력 확대, 중장기 육성 신사업을 위해 투자를 계획하고 있으며, 재무상태 및 시장상황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집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