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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bell interviewK-바이오 클러스터 기행|대전

현실에서 쌓은 노하우, 집단지성의 믿음 '대전 CFO모임'

④박세진 리가켐바이오 사장 "기술은 달라도 고민은 비슷, 동반성장 추구"

대전=차지현 기자   2024-04-26 14:51:28

편집자주

바이오 클러스터의 아이콘 미국 보스턴. 한 세대 이상 구축된 각종 신약개발 인프라는 세계 내로라하는 바이오텍들이 보스턴을 '글로벌 바이오 메카'로 지목하는 배경이다. 한국의 보스턴을 꿈꾸는 바이오 클러스터들 또한 아직 초기 단계지만 각자의 역량과 매력을 앞세워 기업 유치에 혈안이다. 산학연 그리고 임상 병원의 유기적 연계가 갖춰진 전국 각지의 'K-바이오 클러스터'를 찾아 경쟁력을 살펴본다.
대전 바이오 클러스터에는 모임이 많다. 30여년 전 LG화학 기술연구소,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출신이 바이오텍이 하나둘 창업하면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생태계라는 특성 때문이다. 창업자 대부분이 서로 알고 유대관계도 끈끈하다. 자연스레 C레벨급이 주축이 된 상호 협력 모델이 구축됐다.

특히 '대전 바이오 최고재무책임자(CFO) 모임'이 주목된다. 바이오텍의 CFO만을 대상으로 한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유용한 모임이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타지역 바이오텍 CFO까지 찾아올 정도다. 2018년 처음 이 모임을 구상하고 이제껏 좌장을 맡고 있는 인물은 박세진 리가켐바이오 사장이다.

◇입소문 타면서 '전국'서 찾는 CFO 모임, 든든 조력자 역할

"최고경영자(CEO)가 의기투합해 일을 벌이면 누가 막겠나.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CEO가 지시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런 신속한 의사결정이 대전 바이오 클러스터의 경쟁력이다."

대전 유성구 리가켐바이오 본사에서 만난 박 사장은 이 같이 말했다. 상생 분위기로 유명한 대전 지역에서는 바이오텍 CEO들끼리 만남이 잦다. 연구개발(R&D)는 물론 인력 관리, 투자 유치 등 여러 이슈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

타사의 사례를 통해 회사 고민에 대한 답을 얻은 CEO는 CFO에게 업무를 내린다. 'A사는 스톡옵션 부여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고 하더라. 해당 CFO를 만나 얘기 좀 들어봐라'는 식이다. 이는 곧장 CFO간의 모임으로 이어진다. 대전 바이오 클러스터의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유지되는 비결이다.


박 사장은 국내 바이오 업계의 구루다. 오랜 기간 LG화학 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1세대 바이오텍 리가켐바이오를 공동창업했다. 창립 멤버이자 CFO로서 바이오텍이 겪을만한 웬만한 경험은 다 해봤다. 업계서 보기 드문 이력과 연륜을 지닌 그에게 많은 후배 바이오텍 CFO가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이런 일이 늘면서 아예 CFO 모임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2018년께 대전 바이오 생태계에 관심이 많고 지역 내 바이오텍 CFO를 대부분 알고 있던 한 증권사 팀장이 CFO 모임을 만들면 어떠냐는 제안을 해왔다"며 "15명 정도 규모 모임이 꾸려졌고 나이도 경력도 가장 많던 내가 회장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6년이 지난 지금 모임은 기업 35곳, 총 40명 규모로 커졌다. 설립 초기 바이오텍부터 상장사 혹은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까지 다양한 바이오텍 CFO가 소속돼 있다. 시작은 대전 지역이었지만 다른 지역 바이오텍 CFO에도 문은 열려 있다. 바이오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이라는 것만 입증되면 현 멤버 동의 하에 누구나 합류할 수 있는 구조다.

박 사장은 "처음에는 대전 바이오텍이 중심이었는데 유용한 모임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서울이나 판교 바이오텍도 참여 요청을 해왔다"며 "타지역 바이오텍 CFO도 현재 멤버의 반대가 없으면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개방적인 모임"이라고 덧붙였다.

1년에 3~4번 정기 대면 모임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산운용사나 벤처캐피탈(VC) 심사역, 회계사 등 외부 전문가를 초청해 공부하기도 하고 각 회사의 사정을 공유하면서 조언을 나눈다. 미국 법인을 세우려 하는데 변호사를 추천해달라는 요청 등 실무적인 대화가 오간다. 줌으로 빅파마를 섭외해 모임 멤버 30명이 각자 회사에 대해 기업설명회(IR)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적도 있다.

카카오톡 단체방도 모임의 자랑이다. 매일 서로의 소식을 공유하고 여러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박 사장은 이 단체방에 대해 '고민을 올리면 1시간 안에 최적의 답변이 나오는 마법 같은 방'이라고 표현한다. 현장을 뛰는 사람들의 목소리기에 정답에 가장 가까운 해결책들이 바로바로 나온다는 얘기다.

◇'내밀한 정보까지 공유' 분위기 조성한 맏형 리가켐

대전 바이오 클러스터에서 CFO 모임의 위상은 특출나다. 바이오텍 CFO는 재무관리뿐만 아니라 투자 유치, 인사 관리, 기술사업화, 사업개발(BD) 등 경영 전반을 도맡는다. 각 사의 기술은 제각각이지만 전천후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바이오텍 CFO가 하는 고민은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CEO보다 서로 공유할 이야기가 훨씬 많다.

주목할 점은 상당히 깊이 있는 정보가 활발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업종에 있더라도 경쟁 상대에게 회사의 대소사를 얘기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대화 주제가 실패 경험이라면 더욱 그렇다. 모임 안에는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들도 많다. 항체약물접합체(ADC)를 주사업으로 내세운 바이오텍만 5곳에 달한다.

개방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건 박 사장 그리고 김용주 리가켐바이오 대표의 공이 컸다. 업계의 가장 맏형들이 먼저 나서 노하우를 공유하니 후배들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얻고자 하는 이상을 줘야만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리가켐바이오 경영 철학이 대전 바이오 업계 전반으로 흘러 들어갔다.

CFO 모임에서 리가켐바이오의 연봉을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매년 말 각 사가 연봉과 인센티브 등을 공유하는 게 CFO 모임의 연례행사다. 공통 포맷에 작성한 뒤 비밀이 보장되는 제3자에게 보내 회사명을 가려 정리한 뒤 다시 이를 전체가 돌려받는 형태다.


매우 민감한 대외비 사항이지만 박 사장이 선뜻 자사의 정보를 공개하니 후배 바이오텍도 자연스레 이를 따르게 됐다. 모임 초창기 연봉 공유 이후 대전 지역 바이오텍 연봉이 올라가는 효과도 생겨났다. 연봉 인상을 주저하는 CEO에게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회사 위치를 보여주니 바로 '컨펌'이 떨어졌다는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박 사장은 "어느 한 회사의 제도나 노하우는 많은 고민와 시행착오를 거쳐 얻어진 결과물"이라며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기에 남에게 공유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회사 안에서도 선임자가 후임자에게 자기 노하우를 쉽게 안 알려주는데 하물며 다른 회사 그것도 경쟁사에 공유하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바이오 CFO 모임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느슨한 모임이다. 누구 하나 출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유일한 원칙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공유되는 유용성이다. 필요한 걸 얻지 못하는 커뮤니티는 지속성이 없다. 필요성이 충족되는 모임이기에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박 사장의 생각이다.

◇대전, 국내 바이오 30% 차지…"활용가치 높일 것"

지난 3년은 바이오 투자 빙하기였다. 지금도 많은 바이오텍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박 사장은 이런 상황에서 CFO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바이오텍 창업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자 출신이 빚을 수 있는 갈등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것 역시 CFO의 임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박 사장은 바이오텍 CFO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현실성과 균형 감각을 꼽는다.

박 사장은 "CFO는 자존심이 강하고 내 연구가 최고라는 다소 독선적인 과학자(Scientist)가 수장을 맡는 조직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사람"이라며 "예를 들어 투자 조건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결정을 유보하는 CEO에게 지금 자금을 조달하지 않으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경영 전반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서로 다른 전공을 가진 다양한 범주 인력이 모여 한 프로젝트를 하는 게 신약개발이고 이런 조직의 구성원은 자신이 가장 많이 프로젝트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크고 구성원 간 갈등이 수반되는 일이 잦다"며 "핵심인력 이탈은 회사 경쟁력의 문제이기에 중간자로서 갈등을 조율하는 등 인력을 관리하는 것도 CFO의 큰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대전 바이오 바이오텍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박 사장. 그는 지역 네트워크가 더욱 강화되고 이로써 기업들이 받는 혜택도 증가하길 바란다고 했다. 대전 바이오 클러스터가 국내 바이오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는 만큼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다.

박 사장은 "국내 대표 바이오텍이 모여 있고 교류가 활성화된 대전 클러스터의 힘을 잘 활용하면 국내 바이오 업계도 성장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커뮤니티를 더욱 키우면서 우리가 가진 장점을 전략적으로 또 글로벌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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