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몸값은 실적과 전망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거래되는 시장, 투자자가 달라지면 비슷한 조건에도 다른 가치가 매겨질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ADR(미국예탁증서) 상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탈출해 평가의 좌표를 바꾸기 위한 베팅이다.
다만 나스닥이 열어주는 것은 재평가의 가능성일 뿐이다. 관건은 거래 무대의 변화가 실제 몸값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한계 SK하이닉스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국가별 주가수익비율(PER)은 미국이 22.4배로 가장 높았고 일본이 17.9배, 유럽 15.4배 순이었다. 한국은 9.6배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회사가 저평가의 핵심 원인으로 한국 시장을 지목한 배경이다.
실제로 한화투자증권이 6월 비교한 SK하이닉스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6.6배로, 마이크론(11.2배)보다 41% 싸게 평가받았다. SK하이닉스가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 점유율 1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몸값이다.
회사는 이번 ADR 나스닥 상장으로 재평가를 도모하고 있다. 마이크론처럼 미국 증시에 상장된 동종기업들과 동일 선상에서 평가받아 더 높은 멀티플을 받아내겠다는 포석이다. 하지만 타깃이 ADR 가격 상승에만 머물진 않는다. 미국에서 형성된 프리미엄이 차익거래를 통해 코스피 주가에 반영되고, 기업가치까지 끌어올리는 결과를 노리고 있다.
결국 회사가 기대하는 시나리오는 '미국 투자자 유입→ADR 재평가→국내 원주 재평가'로 요약된다. 다만 SK하이닉스 측은 재평가 효과에 대해 "발생 여부와 정도는 시장 환경과 투자자 수요, 경영성과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해외 상장은 재평가의 촉매제일 뿐 결과를 장담해 줄 순 없기 때문이다.
◇ADR 오르면 코스피도 오를까 게다가 미국 시장에서 재평가가 이뤄지더라도 국내 주가 상승으로 무조건 이어지지는 않는다. ADR과 국내 주식의 가격은 서로 연결돼 있어서 어느 한쪽이 더 비싸지면 투자자는 싼 쪽을 사고 비싼 쪽을 팔아 차익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두 가격의 차이는 줄어들지만 미국발 매수세가 국내 원주의 밸류에이션을 지속적으로 높여주는 것은 다른 얘기다.
주식 전환 과정에도 마찰 비용이 숨어 있다. ADR을 해지해 원주를 인출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운 반면, 원주를 기초로 신규 ADR을 발행하려면 예탁기관이 회사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환에 걸리는 시간과 환율, 세금, 수수료도 차익거래의 문턱이 될 수 있다.
그간의 사례는 어떨까. 이미 SK텔레콤과 KT, 포스코홀딩스, 한국전력, KB금융, 신한지주 등 국내기업 상당수가 수십 년 전부터 뉴욕증권거래소에서 ADR을 거래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상장이 동종기업과의 밸류에이션 격차를 없애주진 않았다.
메리츠증권과 블룸버그에 따르면 뉴욕에 ADR을 둔 SK텔레콤과 KT의 2026년 예상 EV/EBITDA(기업가치/EBITDA)는 각각 5.8배, 3.8배에 그쳤다. LG유플러스(3.0배)보다는 높았지만 미국 통신사인 AT&T(6.3배)나 버라이즌(6.6배)에는 못 미친다.
또 KB금융이 올 들어 사상 처음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의 벽을 넘었고 신한지주가 0.8배 안팎을 오가고 있으나, JP모간(2.56배)이나 뱅크오브아메리카(1.50배) 등 미국 대형 은행들의 배수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다. 수익성과 성장성, 사업구조가 다른 만큼 단순 비교는 힘들어도 미국 증시 입성이 꼭 프리미엄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엿볼 수 있다.
해외 사례의 경우 벤치마킹할 수 있는 가까운 비교 대상으론 대만의 TSMC가 있다. 대만 원주와 뉴욕 ADS가 나란히 거래되는 TSMC는 전체 발행주식의 약 20.5%가 ADS(미국예탁주식)의 기초주식으로 예탁된 상태다.
주목할 부분은 물량보다 가격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TSMC ADR은 2025년 7월 대만 주식보다 평균 24% 비싸게 거래됐다. 최근 10년간 평균 프리미엄도 7.4%에 달했다. 같은 주식을 기초로 하는데도 미국 투자자가 더 높은 값을 지불하는 구조다.
하지만 동시에 이 프리미엄이 차익거래를 통해 대만 주가에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환율과 미국 시장 상황, 차익거래의 제약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TSMC의 ADR은 미국에서 프리미엄이 형성될 가능성, 그 프리미엄이 본국 주가의 재평가로 온전히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는 한계를 같이 보여주는 케이스다.
◇넓어지는 투자자 기반…첫 관문은 북빌딩 물론 ADR 상장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분명하다. 우선 투자자 기반이 넓어진다. 미국 상장 종목이나 ADR에만 투자할 수 있는 연기금, 뮤추얼펀드, ETF 등이 SK하이닉스 주식을 직접 담을 수 있고, 일부 미국 인덱스에 편입될 자격도 생긴다. 영어 공시와 현지 증권사의 분석, 글로벌 언론 노출이 늘어나는 것 역시 정보 격차를 줄여줄 수 있다.
결국 재평가의 첫 관문은 미국시간 기준 7월 9일 진행되는 가격 결정이다. 미국 기관투자자들은 북빌딩(수요예측)에서 희망 가격과 주문 수량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최종 공모가격과 물량이 정해진다. 미국 투자자들이 SK하이닉스에 어느 정도의 수요를 보이는지 처음 확인하는 절차다.
다만 이 공모가격을 미국 시장이 새로 매긴 독립적인 몸값으로 볼 수는 없다. 가격의 출발점부터 국내 주가이기 때문이다. 주관사는 가격결정일 직전 코스피 종가를 ADR 교환비율과 환율에 맞춰 환산한 뒤 미국 기관투자자의 주문을 반영해 공모가격을 정한다.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범위도 제한돼 있다. 국내 제3자배정 유상증자 규정에 따라 공모가격은 기준주가에서 최대 10% 할인한 수준보다 내려갈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가격 결정은 미국 시장이 완전히 새로운 기업가치를 매긴다기보다, 국내 주가를 기준으로 SK하이닉스에 어느 정도의 할인이나 프리미엄을 인정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자들의 본격적인 평가는 7월 10일 거래가 시작된 뒤 드러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