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도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을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가이던스가 없고 답변 자체가 어렵다, 혹은 홍보실이 없어서 였다. 별도 채널 없이 IR 담당자 한두 명이 전화를 받는 구조다 보니 며칠씩 답이 없는 경우도 잦았다. 모두 결국은 취재에 응했는데 그 과정에서 들은 한 코스닥 기업 IR 담당자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소통이 이제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했다. 동시에 솔직한 두려움도 털어놨다. 반도체 호황에 올라타며 영업이익이 갑자기 뛴 작은 기업들은 하루아침에 시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동안은 관심 밖에 있어도 무방했던 회사였는데 이제는 한마디가 주가나 다음 계약에 영향을 미치는 처지가 됐다.
비슷한 시기 만난 또 다른 기업은 최근 대기업집단에 편입된 곳이다. 고민의 본질은 같았다. 대기업 수준의 이사회를 갖춰야 하는데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후보군을 짜고 위원회 체계를 정비하는 일이 생각보다 더디다. 그렇다고 미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집단에 편입된 이상 그에 맞는 거버넌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모두 몸집이 갑자기 커진 데서 비롯된 진통이다. 호황이든 지정이든 외부 요인으로 빠르게 자란 기업은 그 속도만큼 채워야 할 것들이 따로 있다. 당장 이들이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처방은 무엇일까. 거창한 IR 조직을 신설하거나 글로벌 거버넌스 룰을 도입하라는 게 아니다. 대화의 프로토콜부터 바꾸는 일이다.
침묵보다 차라리 정제된 답변 한 줄이 낫다. IR 인력을 한두 명이라도 늘리고 분기 실적 등을 정기적으로 소통하는 채널을 만드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혹은 담당자 한 명에게 외풍을 다 맞게 두지 말고 최고경영자(CEO)나 C레벨이 직접 시장의 질문에 답하는 규칙을 두면 어떨까. 코스닥 기업들의 연구개발(R&D) 성과를 보면 기술력은 충분히 갖췄다. 이 성과를 설명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이사회도 마찬가지다. 사외이사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하거나 서치펌을 통해 미리 후보군을 점검해두면 막상 필요한 시점에 닥쳤을 때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대단한 결단이 아니라 실무적인 준비의 영역이다. 사람 수만 채운다고 완성되지 않으니 새 이사에게는 회의 전에 충분한 자료와 질문할 시간을 줘야 한다.
호황이나 대기업 집단 입성은 기업이 고른 타이밍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대화를 준비하는 일은 기업의 몫이다.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적어도 그 대화의 질만큼은 스스로 정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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