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THECFO가 제공하는 ‘아카이브(Archive)’는 시장에서 벌어진 이슈의 발단과 결말을 기록한다. 기업의 현재를 만든 이정표적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됐을까. 사건의 방향성을 흔들어 놓은 주요 이벤트는 뭘까. 기사 한 건이 하나의 조각이라면 아카이브는 조각이 맞춰진 퍼즐이다. 거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관계를 아카이브가 담았다.
동서식품이 커피믹스를 출시한 지 올해로 50년이 됐다. 원두커피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지금도 하루 약 2200만잔의 커피믹스가 팔린다. 한 해 판매량만 약 80억잔 분량에 달한다. 커피를 마시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커피믹스 왕좌는 흔들리지 않았다.
동서식품의 출발점은 인스턴트커피의 국내 생산이었다. 수입 완제품과 미군 보급품이 비공식 경로로 유통되던 시절 수입 원두를 들여와 인스턴트커피를 국내에서 직접 만들겠다는 의지로 생산 기반을 마련했다. 1976년에는 커피, 크리머, 설탕을 한 봉지에 담은 '맥스웰하우스 커피믹스'를 세계 최초로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시장을 선점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세기 동안 1위를 지켰다고 설명할 수 없다. 1989년 네슬레가 '테이스터스 초이스'를 앞세워 국내 시장에 진입했고 2010년대에는 남양유업이 '프렌치카페 카페믹스'로 점유율을 파고들었다. 커피전문점이 확산되면서 경쟁 무대도 인스턴트커피에서 원두커피와 홈카페로 넓어졌다.
동서식품은 시장 변화에 맞춰 주력 브랜드와 제품 형태를 바꿨다. 맥스웰하우스에서 맥심으로 중심축을 옮겼고 카누로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을 열었다. 병에 담긴 인스턴트커피와 커피믹스에서 스틱형 원두커피와 캡슐로 '한 잔의 기준'을 거듭 바꾼 것이 동서식품의 역사다.
이 문서는 해방 이후 인스턴트커피의 유입부터 1968년 동서식품 설립과 커피믹스 개발, 후발주자의 공세와 카누·캡슐커피 도전까지 동서식품이 커피 시장의 왕좌에 오르고 지켜온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다.
해방 이후 국내에 커피가 퍼진 주요 통로는 미군부대였다. 미군 보급품으로 들어온 인스턴트커피가 시중에서도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커피를 접하는 사람이 자연스레 늘어났다. 커피 소비가 넓어지자 이를 마실 수 있는 다방도 활기를 띠었다. 6·25 전쟁 이후에는 다방이 도심의 대표적인 만남 장소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에는 명동, 종로, 충무로 등을 중심으로 음악다방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다방이 젊은 층의 만남과 여가 공간으로 자리 잡으면서 커피도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의 음료에서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변해갔다.
문제는 공급이었다. 정부가 커피 완제품 수입을 제한하면서 시중 물량 상당수는 미군 보급품이나 밀수품에 의존했다. 적은 양으로 얼마나 많은 커피를 만들어 내느냐가 다방 주인의 솜씨를 가르는 기준이 될 만큼 귀했다.
수요가 커질수록 불안정한 유통 구조의 한계도 뚜렷해졌다. 원두를 들여와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가공할 기업이 필요했다. 동서식품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수입 완제품에 의존하던 시장을 국내 생산 체제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커피믹스의 간편함은 사무실, 공사현장, 등산로 등에서 빛을 발했다. 컵과 뜨거운 물만 있으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커피 자판기도 지하철역, 고속도로 휴게소 등으로 퍼졌다. 자판기와 커피믹스는 형태는 달랐지만 역할은 같았다. 커피를 다방에서 주문해 마시던 음료에서 필요할 때 바로 즐기는 일상적인 음료로 바꿨다. 다방에 머물던 커피가 거리, 일터, 가정으로 스며들며 커피의 대중화에도 속도가 붙었다.
동서식품은 시장을 선점하고 생산 기반도 갖추고 있었다. 인스턴트커피 설비와 프리마 대량생산 체제를 확보했고 배합 기술과 포장 공정도 축적했다. 제품 개발부터 생산까지 이어지는 기반은 후발업체가 단기간에 따라오기 어려운 장벽이 됐다.
대중화에 성공한 동서식품의 다음 과제는 커피의 품질이었다. 간편함을 넘어 향과 맛을 끌어올려야 했다. 커피믹스로 시장을 넓힌 동서식품은 더 나은 한 잔을 만들기 위한 기술 개발에 나섰다.
두 회사는 서로 다른 전략을 택했다. 네슬레가 유리병에 담긴 인스턴트커피 고급 수요를 공략하는 동안 동서식품은 커피믹스를 차세대 주력 시장으로 키웠다. 한쪽은 해외 브랜드 이미지에 무게를 뒀고 다른 쪽은 일상에서 자주 마시는 한 잔에 집중한 셈이다.
네슬레를 비롯한 여러 업체가 뛰어들면서 커피 시장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회사는 한국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부드럽고 깔끔한 맛과 향을 구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탄생한 제품이 1989년 출시한 '맥심 모카골드 커피믹스'였다. 1987년 맥심 커피믹스에 동결건조 커피와 스틱 포장을 도입한 데 이어 맛까지 한국인 취향에 맞게 다듬었다. 동서식품의 대표 제품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 커피믹스'.
모카골드 개발의 초점은 세 원료의 균형이었다. 동서식품은 원두 배합, 로스팅 강도, 추출 공정을 손보며 커피, 프리마, 설탕이 어우러지는 최적의 비율을 찾았다. 커피 향은 살리면서 쓴맛을 낮춰 부드러운 맛을 구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커피믹스가 병에 담긴 인스턴트커피를 앞서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IMF 외환위기였다. 소비자들이 커피값을 아끼면서 다방이나 커피숍 대신 사무실에서 직접 타 마시는 문화가 퍼졌다. 같은 시기 정수기도 빠르게 보급되면서 간편한 커피믹스가 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동서식품은 커피믹스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부터 제품과 생산 기반을 갖춰 외환위기 이후 늘어난 수요를 빠르게 흡수했다. 반면 네슬레는 병 제품의 초기 돌풍을 커피믹스로 잇지 못했고 2000년대 들어서야 커피믹스 생산을 본격화했다. 동서식품은 시장의 성장 방향을 먼저 예측하고 준비하며 네슬레와 격차를 벌렸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해당 문구가 기존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오인하게 할 우려가 있다며 비방광고로 판단했다. 식약청 판단에 따라 천안시는 2011년 2월 남양유업에 시정명령을 내렸다. 카제인나트륨은 물과 기름이 잘 섞이도록 돕는 유화제로 사용이 허가된 식품첨가물이었다.
행정 조치에도 카제인나트륨이라는 낯선 이름은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프렌치카페는 기존 커피믹스와 성분부터 다른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논란이 커질수록 후발 브랜드의 인지도도 함께 높아졌다.
프렌치카페는 2011년 6월 대형마트 기준 점유율 11.3%를 기록했다. 동서식품은 77.1%로 선두를 지켰지만 남양유업은 한국네슬레를 밀어내고 2위에 올랐다. 테이스터스 초이스 진출 이후 처음으로 커피믹스 시장의 2위가 바뀌었다.
남양유업이 동서식품의 선두 자리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유'를 새로운 구매 기준으로 내세우며 오랫동안 굳어 있던 경쟁 구도에 균열을 냈다.
동서식품은 두 갈래로 대응해야 했다. 커피믹스 시장에서는 우유를 선호하는 소비자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내놔야 했다. 동시에 커피믹스 밖으로 넓어지는 아메리카노 수요도 붙잡아야 했다.
동서식품은 2011년 10월 인스턴트 원두커피 '맥심 카누'를 선보였다. 남양유업의 공세가 거세지던 때였지만 카누는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즐기기 시작한 소비자를 겨냥했다.
카누는 에스프레소 방식으로 추출한 커피액을 동결건조한 파우더에 미세하게 간 볶은 원두를 입힌 제품이었다. 물에 녹는 커피 파우더에 분쇄 원두의 맛과 향을 더했다. 별도 추출 과정 없이도 아메리카노 맛에 가까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한 것이다.
카누는 카페(Cafe) 또는 커피(Coffee)와 새로움을 뜻하는 뉴(New)를 결합한 이름이다. 동서식품은 카누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로 소개했다. 출시 당시에는 '맥심 카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익숙한 맥심 브랜드에 카누라는 새 이름을 더하면서도 모카골드와 다른 커피라는 인상은 분명히 했다.
카누는 커피전문점의 대체재에 그치지 않았다. 인스턴트 원두커피라는 새로운 시장을 대중화했다. 커피믹스에서 블랙커피로 취향을 옮긴 소비자도 동서식품 브랜드 안에 머물 수 있게 됐다.
출시 첫해 판매량은 3800만잔이었다. 2012년 2억잔을 넘어선 데 이어 2016년에는 10억3000만잔까지 늘었다. 커피믹스 밖에서 출발한 카누는 맥심 모카골드에 이은 동서식품의 대중 브랜드로 성장했다.
동서식품은 기존 주력 제품의 수요를 잠식할 가능성도 감수했다. 동서식품은 아메리카노로 향하는 소비자를 커피믹스에 붙잡아두는 대신 카누로 옮겨갈 길을 열었다. 주력 시장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달라진 취향에서 새로운 성장축을 만든 것이다.
동서식품은 카누 바리스타 출시 이후 머신과 캡슐 제품군을 넓혀왔다. 소형 머신을 추가하고 원두와 로스팅 강도에 따라 캡슐 선택지도 늘렸다. 2026년 7월에는 우유 메뉴까지 만들 수 있는 프리미엄 머신 '카누 바리스타 오아시스'를 선보이며 활용 범위를 넓혔다.
다만 캡슐커피 시장에서 동서식품의 도전은 아직 진행형이다. 커피믹스처럼 제품 하나로 시장을 이끄는 것과 달리 캡슐커피는 머신 보급이 전제돼야 한다. 소비자가 카누 머신을 선택하고 전용 캡슐을 계속 구매하도록 만드는 일이 관건이다.
동서식품은 1976년 커피, 크리머, 설탕을 한 봉지에 담아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카누 바리스타에서는 원두와 추출 기술을 머신과 캡슐에 나눠 담았다. 누구나 손쉽게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도록 한 잔의 조건을 미리 설계했다는 점은 같다.
달라진 것은 시장에서의 위치다. 그동안 먼저 커피믹스 시장을 만들고 후발주자의 도전을 받아냈다. 그러나 캡슐커피에서는 첫 실패를 딛고 이미 굳어진 시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반세기 동안 왕좌를 지켜온 동서식품이 새로운 성장 시장에서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커피믹스로 쌓은 경쟁력을 머신과 캡슐 시장으로 옮기는 일이 동서식품의 다음 과제다.
동서식품, 캡슐커피 머신 '카누 바리스타 오아시스'.
[1] 당시 정부는 부족한 외화를 산업 설비와 원자재 수입에 우선 배정하기 위해 커피를 사치성 기호품으로 분류했다. 1961년에는 외국산 커피의 판매뿐 아니라 영리 목적의 소유와 보관까지 금지했다. 1964년부터 완제품 대신 생두만 외화 쿼터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수입을 승인했고 1968년 커피를 수입금지 품목에서 제한승인 품목으로 완화했다.
[2] 2017년 특허청이 소셜미디어 이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우리나라를 빛낸 발명품' 조사에서 커피믹스는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에 이어 5위에 올랐다.
[3] 처음에는 국내 아웃도어 시장을 겨냥했는데 해외에도 수출되어 '커피믹스(Coffee Mix)'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4] 커피 추출액을 열풍 속에 미세하게 분사해 수분을 빠르게 증발시키고 고운 분말 형태의 인스턴트커피를 만드는 제조 기술.
[5] 농축한 커피 추출액을 급속 냉동한 뒤 진공 상태에서 얼음을 액체로 거치지 않고 곧바로 수증기로 승화시켜 제거하는 저온 건조 기술. 커피의 향은 거의 대부분 보존되지만, 장비 초기 투자 비용과 전기 등 유지 관리 비용이 분무건조 방식보다 모두 높다.
[6] 1980년대 후반에는 수입 자유화와 소득 증가로 외국 유명 브랜드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이전까지 접하기 어려웠던 수입품에는 희소성이 붙었고 외국 브랜드를 국산보다 품질이 좋고 세련된 제품으로 받아들이는 소비 심리도 강했다. 테이스터스 초이스는 세계 최대 식품기업 네슬레의 브랜드라는 점과 고급 이미지를 앞세워 이 수요를 흡수했다.
[7] 이 시기 커피믹스 시장은 연평균 24% 성장했다.
[8] 우유의 주요 단백질인 카제인을 분리한 뒤 나트륨과 결합해 물에 잘 녹도록 만든 성분이다. 커피 크리머에서는 식물성 유지와 물이 잘 섞이도록 돕고 부드러운 맛과 질감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는 식품첨가물로 분류하지만 식약처가 사용을 허용한 안전한 성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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