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플래닛으로 수년만에 돌아가는 11번가의 궤적엔 시사하는 바가 있다. SK그룹이 10년 넘게 이커머스사업에서 고전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결정이다. 애초 재무적으로 우량한 상태로 독립했던 11번가가 자본잠식 직전까지 왔다는 점에서 그동안의 우여곡절이 짐작된다.
SK스퀘어는 이달 26일 SK플래닛에 3900억원을 출자한다. 11번가 매각대금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SK스퀘어는 11번가 지분을 전부 SK플래닛에 매각했으며 매각 총액은 4673억원이다.
이번 매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2018년 11번가에 5000억원을 투자했던 FI, 즉 나일홀딩스에 대한 투자금 상환에 있다. SK스퀘어가 유상증자로 밀어준 대금으로 SK플래닛이 11번가 지분을 인수하고, FI에게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결국 SK스퀘어 자금으로 FI 지분을 정리하는 구조다.
FI들은 원금을 회수하게 됐지만, SK스퀘어 입장에서는 재무적 부담을 피할 수 없다. 현금 유입은 없는데 지출만 4000억원 가까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11번가의 장부가액이 6607억원인 반면 매각가(3809억원)는 그보다 훨씬 낮은 만큼 2798억원의 회계상 손실까지 인식해야 한다. 국민연금과의 관계, 그리고 시장에서의 신뢰 유지를 고려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이런 복잡한 거래가 발생한 원인을 짚어보려면 SK의 이커머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SK플래닛은 2011년 10월 SK텔레콤이 플랫폼 사업을 분할하면서 탄생했다. 디지털생태계 주도권을 잡겠다는 구상이었는데 몇 년 뒤 커머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2016년엔 11번가 운영사를 흡수하면서 '2020년까지 거래액 12조원을 달성하고 국내 종합유통 빅3로 도약하겠다'는 목포를 세웠다. 합병 직후 판교에 있던 SK플래닛 직원들이 신대방동의 11번가 사무실을 찾아 유통 실무를 배우려고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커머스에 진지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은 순탄치 않았다. 11번가의 수익성 확보는 늦어졌고 앞서 진행했던 미국 플랫폼 기업인 ‘샵킥’ 인수도 실패로 끝났다. SK플래닛은 샵킥을 통해 미국 모바일 커머스 시장을 노렸지만 뚜렷한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하고 결국 2019년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3500억원이나 손실을 봤다.
샵킥 실패와 함께 국내 경쟁 심화로 SK플래닛이 어려워지면서 꺼냈던 카드가 11번가의 독립이다. 적자가 계속되는 이유 중 하나가 11번가였기 때문이다. 2017년 SK플래닛이 기록한 순손실은 무려 5100억원. 11번가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커머스 사업에 대한 기대가 여전했던 만큼 11번가를 떼어내서 IPO를 하고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IPO를 염두에 뒀으니 회사를 재무적으로 깨끗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분사 과정에서 SK플래닛은 회사의 모든 차입금을 그대로 떠안았다. 11번가에는 부채를 단 한 푼도 남기지 않았고 현금성 자산만 들려주고 독립시켰다.
SK플래닛이 재무적 부담을 모두 짊어진 덕분에 11번가는 ‘차입금 0원’이라는 깨끗한 상태로 분사했다. 지금 갚는 투자금도 이때 끌어왔던 돈이다. 당시 FI들한테 5000억원어치 투자를 유치하면서 11번가는 2018년 말 기준으로 현금성자산이 5067억 원, 부채비율은 90%에 불과한 우량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이렇게 '굿 컴퍼니'로 출발했던 11번가가 다시 애물단지로 돌아온 것은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7년 동안 매년 순손실을 기록했는데 작년까지쌓인 손실 규모가 4400억원에 달한다.
계속된 순손실은 자본을 깎아 먹었다. 분사할 때만 해도 자기자본을 5500억원 들고 출발했는데 작년 말 기준으론 299억원 남았다. 7년 만에 자본의 95%가 사라진 셈이다. 100%를 밑돌던 부채비율도 1261%까지 치솟았다. 사실상 자본잠식이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SK텔레콤 자회사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예전과 비교하면 사세가 비교할 수 없이 쪼그라들었다.
업계 관계자는 “11번가의 여정은 SK그룹이 십여년간 이커머스 시장에서 겪은 시행착오의 축소판”이라며 “SK플래닛 산하에서 다시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