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붐을 타고 반도체 시장이 역사적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반면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업체들의 체감 온도는 엇갈리고 있다. HBM 투자가 확대되면서 낙수효과를 기대했지만 고객사 투자 지연과 재고조정, 중국향 매출 둔화 등 복합적인 영향에 기업별로 극과 극의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더벨은 국내외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의 1분기 실적을 분석해 반도체 생태계의 현황과 미래를 점검해봤다.
기업의 연구개발(R&D) 비용은 미래 매출 구조를 가늠할 수 있는 선행 지표다. 특히 반도체 장비 기업은 주요 고객사의 생산라인에 투입될 장비를 선제적으로 개발하고 검증받아야 실제 매출로 연결할 수 있다. 연구개발비의 집행 방향을 살펴보면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이 고객사의 공정 과정 중 어느 영역을 선점하려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올해 1분기에는 전공정 장비사들의 연구개발 투자가 눈에 띈다. 반도체 회로가 미세해지고 3D 낸드처럼 구조가 깊어질수록 정밀 장비의 중요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전공정 기업들은 증착·식각·세정 등 핵심 공정 장비의 고도화에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주성엔지니어링, 매출액 절반 R&D에…주요 기업들 25% 투입
반도체 전공정 장비사 가운데 연구개발 비율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증착 장비 기업들이다. 대표 주자인 주성엔지니어링은 1분기 연구개발 비용으로 254억원을 집행했다. 매출액 대비 비율은 46.28%에 달한다. 원익IPS는 매출의 25.24%인 416억원을 연구개발비로 사용했고, 유진테크 역시 250억원을 기록하며 연구개발비 비율이 24.6%에 달했다.
이들 기업은 단기적인 장비 판매보다 고객사의 반도체 양산 공정에 진입할 가능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장비는 고객사의 공정 조건과 생산성, 수율 기준을 통과해야 실제 발주와 매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검증을 통과한 장비는 같은 공정의 증설이나 세대 전환 시기에 다시 발주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증착 장비 기업의 연구개발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고객사가 미세공정과 3D 낸드 고단화에 나서면 기존 장비만으로는 균일한 박막 형성이나 좁고 깊은 구조 내부의 물질 제어가 어려워진다. 장비사는 고객사가 요구하는 막 두께와 균일도, 생산성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선행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
세 기업 모두 웨이퍼 위에 박막을 형성하거나 결정층을 성장시키는 전공정 핵심 장비를 개발하고 있다. 원자층 단위로 얇은 막을 쌓는 ALD(원자층증착) 장비가 대표적이다. 선제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기술과 제품을 확보하고, 고객사의 차세대 생산라인에 진입하는 것이 이들 기업의 일차적인 목표다.
주성엔지니어링은 ALD와 CVD(화학기상증착) 계열 장비를 폭넓게 개발해왔다.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메모리 미세화와 3D 구조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박막 형성 장비인 하프늄옥사이드 원자층증착(HfO₂-ALD) 등을 주요 연구 성과로 제시했다.
원익IPS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 연구개발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차세대 3D 낸드용 선택적 제거 공정 장비와 8.6세대 디스플레이 장비 등을 개발하며 전공정 분야 선도 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목표다. 포트폴리오 다변화도 함께 추진 중이다. 유진테크 역시 기존 주력 제품군 외 영역에서도 연구개발을 이어가며 시장 저변 확대를 꾀하고 있다.
그래픽=챗GPT가 생성한 이미지.
◇테스·피에스케이, 납품장비 적용범위 확대에 초점
연구개발 비율의 절대적 수치는 앞선 기업들보다 낮지만,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기업들도 눈에 띈다. 테스와 피에스케이는 현재 강점을 보유한 공정 분야에서 적용 범위를 넓히는 방식으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두 기업 모두 기존 기술력을 바탕으로 난도가 높은 하이엔드 공정 진입을 노리고 있다.
테스는 막을 형성하는 증착 장비에, 피에스케이는 공정 후 남은 물질을 제거하고 세정하는 장비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테스의 1분기 연구개발비는 84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비율은 8.6%다.
테스는 플라즈마를 활용해 웨이퍼 위에 막을 형성하는 PECVD(플라즈마 화학기상증착) 장비를 기반으로 막질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다. 반도체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막의 종류가 세분화되는 만큼 연구개발 영역도 비정질탄소막(ACL) 등으로 확장됐다.
피에스케이는 제거 및 세정 공정에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1분기 연구개발비는 77억원, 매출액 대비 비율은 4.9%다. 주력 제품인 건식 박리 장비와 함께 신규 하드마스크 제거 장비, ALE(원자층식각) 장비 등을 핵심 연구 성과와 과제로 제시했다.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의 1분기 R&D 지표는 전공정 장비사 내부에서도 연구개발 투자 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연구개발 비율이 높다는 것은 고객사의 차세대 공정에 먼저 진입하기 위한 기술 개발과 검증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의미다.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더라도 현재 강점을 가진 공정에서 적용 범위를 꾸준히 넓히고 있다면 향후 매출 구조는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전공정 장비사의 R&D 지표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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