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회사의 CEO로 흔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보통 전략에 능한 전략통이나 오너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 CEO에 안착하죠. 그런데 롯데는 올해 연말 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숫자를 다루는 CFO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지주 CFO 출신이 지주 CEO로 가는 길, 흔한 코스는 아니죠. 고정욱 롯데지주 대표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타이밍입니다. 지주를 먹여 살리던 핵심 캐시카우였던 롯데케미칼이 흔들리고,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인수의 후폭풍이 남아 있고, 건설은 PF 그림자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석화 불황, 인수 부담, 건설 리스크. 3중고를 정면에서 맞은 시점에 CFO가 CEO가 됐는데요.
오늘 피플앤스토리에서는 고정욱 롯데지주 대표를 중심으로, 롯데가 왜 지금 이 카드를 꺼냈는지, 그리고 고정욱 대표는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지 짚어보겠습니다.
#고정욱, 숫자로 커리어를 만든 롯데맨
고정욱 대표는 1992년 롯데건설로 입사한 뒤 롯데그룹 내에서 오래 활약해온 정통 롯데맨입니다. 1966년생으로 충암고등학교와 홍익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국제경제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그는 롯데캐피탈에서 RM과 영업, 전략 쪽을 두루 거쳤고, 2019년에는 롯데캐피탈 대표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현장에서 돈을 빌리고, 키고, 또 갚는 일의 감각을 몸으로 익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주 CFO는 한 기업만 보는 자리가 아닙니다. 계열사들의 현금흐름이 어디서 막히는지, 어떤 자산이 위험 신호인지, 시장이 '롯데'라는 이름의 신용을 어떻게 가격 매기는지, 복잡한 사거리의 신호가 동시에 오는 상황에서도 그걸 한 번에 듣고 조율해야 하는 자리죠. 고정욱 대표는 그 한복판에 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롯데는 결국 그를 지주 대표로 올렸습니다.
#레고랜드 이후, 롯데가 배운 건 '유동성은 심리'
고정욱 대표가 CFO로서 존재감을 키운 시점은 위기 구간과 겹칩니다. 2022년 레고랜드 사태 이후, 국내 크레딧 시장이 얼어붙었던 때였습니다. 건설 프로젝트파이낸싱(PF) 흔들리면 계열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룹 전체의 불안감으로 번집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돈이 필요해 보이는 순간부터 매겨지는 금리가 달라지잖아요.
당시 롯데건설 PF는 시장의 집중 타깃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룹은 '빠르게, 크게, 확실하게' 메시지를 내야 했습니다. 고정욱 대표는 그 시기에 지주 CFO로서 시장과 대화하고, 자금줄을 설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메리츠금융과 손잡고 1조5000억원의 펀드를 조성하죠.
이 해결법은 고정욱 대표의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시장의 의심이 더 커지기 전에 명확한 숫자로 답변하는 위기관리형. 지주 CEO가 된 지금도 그의 본업은 결국 같습니다. 시장의 질문에 숫자로 답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숫자를 바꿔야 합니다.
#지주 먹여 살리던 케미칼, 지금은 흔든다
롯데지주의 고민은 단순히 지주 자체의 손익이 아닙니다. 지주는 계열사 배당과 지분가치로 좌우됩니다. 그중에서도 캐시카우 롯데케미칼이 흔들리면 체감이 큽니다. 롯데케미칼은 2024년에 연결 기준 매출 20조4304억원, 영업손실 8948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조 단위 영업이익을 벌던 석화 기업이 적자 폭을 키운 겁니다.
이유는 석화 산업의 공통 고민이죠. 중국발 증설과 글로벌 수요 둔화가 겹치며 석유화학 업황이 흐려졌습니다. 제품 가격이 낮아졌는데 원가와 고정비는 그대로 였죠. 문제는 이게 단기 이벤트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석화는 사이클 산업이지만, 이번엔 공급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는 평가가 같이 나옵니다. 지주 CEO가 CFO 출신이라는 건, 이 업황을 언젠가 오를 거라는 사이클 기대감으로 버티기보다, 버티는 기간에 필요한 현금을 어떻게 만들지부터 계산하겠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로, 인수는 끝이 아니라 시작
롯데가 배터리 소재로 리빌딩을 선언했을 때, 시장이 가장 크게 기억한 이벤트는 일진머티리얼즈 인수입니다. 롯데케미칼은 2022년 이 거래에 2조7000억원을 투입했습니다.
인수는 미래를 사는 결정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재무 과제를 무겁게 만들죠. 특히 업황이 꺾인 시기라면 더 그렇죠.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2024년에 매출 9023억원, 영업손실 644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전기차 시장 조정, 고객사 재고 조정 등의 어려움이 있던 시기죠.
인수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이릅니다. 다만 CFO 출신 CEO가 온 이상, 질문은 더 집요해지겠죠. 롯데그룹이 산 건 성장 스토리였는데, 그 성장 구간을 버틸 운영 현금흐름과 투자 속도 조절 장치가 준비돼 있느냐. 그 답이 없으면 인수는 청사진이 아니라 부담으로 남습니다.
#아직 어려운 건설, PF는 숫자보다 신용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축은 롯데건설입니다. 2025년 3월 말 연결 기준 PF보증 규모는 3조6000억원입니다. 연대보증과 채무인수, 자금보충을 모두 포함한 수치고요. 이 가운데 도급사업 PF보증이 3조1000억원, 정비사업이 5000억원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규모보다 성격입니다. 도급사업 PF보증 3조1000억원 중 2조1000억원이 미착공 현장 관련 보증으로 분류돼 있습니다. 지방과 수도권 외곽 지역 관련 보증 9000억원, 홈플러스 점포 개발사업 관련 보증 6000억원도 주요 모니터링 대상으로 언급됐습니다.
아직 손실이 현실화되지 않았더라도 차환 난이도와 시장의 불신이 금리와 조달 창구를 먼저 불안하게 만들 수 있죠. 신용평가사들은 미착공 비중이 큰 구조에서 특정 사업장의 보증이 실질 손실 부담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주 CFO 출신이 CEO가 되면 여기서 선택지는 더 또렷해집니다. 리스크를 숨기지 말고, 미착공 비중을 얼마나 빨리 줄였는지로 증명해야 합니다.
#롯데지주도 쉽지 않은 과제
고정욱 대표가 지주 CEO로 올라섰다고 해서, 지주가 자본 안전지대가 되는 건 아닙니다. 지주 자체도 레버리지가 있는 구조입니다. 신용평가 자료 기준으로 2025년 3월 말 롯데지주 별도 기준 순차입금은 3조5000억원, 순차입금 의존도는 40.8퍼센트, 이중레버리지는 179.8%로 제시됩니다.
계열사가 배당을 줄이면 지주가 흔들리고, 지주가 흔들리면 그룹의 신용도에는 다시 빨간불이 들어오죠. 그래서 롯데는 지금 지주 CEO에 CFO 출신을 선임했습니다. 재무 신뢰 회복이 먼저라는 메시지로도 읽힙니다.
#구원투수는 시간을 사는 사람
그럼 고정욱 대표는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요. 구원투수는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에이스가 아닐 때도 많습니다. 승부를 뒤집기보다, 더 망가지지 않게 막고, 다음 이닝으로 시간을 사는 역할이죠. 지금 롯데의 현실은 화려한 역전극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석화는 싸이클이 돌아와야 하고, 배터리 소재는 시간이 필요하고, 건설 PF는 완전한 신뢰 회복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고정욱 대표의 성적표는 '한방의 홈런'이 아니라 현금흐름표와 신용스프레드의 안정으로 증명되죠. 그가 진짜 구원투수라면, 그 결과는 눈에 띄는 헤드라인이 아니라 숫자의 조용한 변화로 먼저 나타날 겁니다. 차입 만기 구조가 덜 불안해지고, 우발채무가 줄고, 투자 속도가 조정되고, 계열사들이 숨 쉴 시간이 생기는 방식으로요.
롯데지주 CEO에 오른 고정욱 대표는 흔한 타입의 리더가 아닙니다. 지주 CFO에서 지주 CEO로, 현금흐름의 최전선에서 그룹의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석화 불황, 인수 부담, 건설 리스크. 3중고가 겹친 지금 롯데가 원하는 건, 화려한 비전보다 먼저 흔들리지 않는 숫자일 겁니다.
고정욱 대표는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까요. 답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그가 시간을 벌어올 수 있느냐.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구조를 바꿀 수 있느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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