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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투자증권의 역사

김태영 기자  2026-09-18 09: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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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THECFO가 제공하는 ‘아카이브(Archive)’는 시장에서 벌어진 이슈의 발단과 결말을 기록한다. 기업의 현재를 만든 이정표적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됐을까. 사건의 방향성을 흔들어 놓은 주요 이벤트는 뭘까. 기사 한 건이 하나의 조각이라면 아카이브는 조각이 맞춰진 퍼즐이다. 거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관계를 아카이브가 담았다.

목차

1. 개요

2. 두 개의 뿌리

2.1. 1969년 한보증권 : 손해보험사들이 세운 회사

2.2. 1954년 대도증권 : 또 하나의 계보

3. 첫 번째 손바뀜 : 럭키금성 (1983)

3.1. 국제증권과 대보증권의 통합

3.2. 럭키증권에서 LG투자증권으로

3.3. LG카드 사태와 금융업 철수

4. 두 번째 손바뀜 : 우리금융 (2004~2014)

4.1. 2975억원의 인수

4.2. 우리증권과의 합병 : 우리투자증권 출범

4.3. 자기자본 1위 증권사

4.4. 민영화가 부른 세 번째 손바뀜

5. 세종증권 계보 : 농협의 첫 증권사 (2006)

5.1. 고려투자금융에서 세종증권까지

5.2. 1100억원의 인수와 매각 로비 사건

5.3. NH투자증권에서 NH농협증권으로

6. 세 번째 손바뀜 : 농협금융 (2014)

6.1. 업계 12위가 업계 2위를 품다

6.2. 2014년 12월 30일 : NH투자증권 출범

7. 통합 이후 : 세 명의 사장과 두 개의 사건

7.1. 김원규 : 초대형 IB

7.2. 정영채 : 발행어음과 옵티머스

7.3. 윤병운 : 최대 실적과 연임 불발

7.4. 각자대표 체제

8. 손바뀜이 남긴 것

8.1. 법인은 하나, 뿌리는 둘

8.2. 농협계가 아닌 사장들

8.3. 남은 과제

최초 문서 작성일: 2026년 9월 18일

1. 개요접기



NH투자증권은 6번 이름이 바뀌었다. 1969년 손해보험사들이 공동출자해 세운 한보증권으로 출발한 뒤 대보증권·럭키증권·LG증권·LG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을 거쳐 지금의 이름에 이르렀다. 사명이 바뀐 것이 여섯 번, 대주주가 바뀐 것이 세 번이다.

주인이 바뀐 계기는 매번 달랐다. 1983년에는 럭키금성그룹이 증권업에 진출하려 했고 2004년에는 LG그룹이 카드 사태로 금융업에서 철수해야 했다. 2014년에는 우리금융지주가 공적자금을 갚기 위해 계열사를 내놔야 했다. 회사가 잘못해서 팔린 적은 없다. 늘 대주주 쪽 사정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계보가 겹친다. 농협은 2014년 우리투자증권을 인수하기 전에 이미 증권사를 갖고 있었다. 2006년 세종증권을 인수해 NH투자증권이라 이름 붙인 회사다. 이 회사는 1982년 동아그룹의 고려투자금융으로 출발해 동아증권·세종증권을 거쳤고, 농협에 팔리는 과정에서 대통령 형이 연루된 로비 사건의 무대가 됐다. 2014년 말 두 계보가 합쳐지면서 현재의 NH투자증권이 만들어졌다. 법인은 하나지만 뿌리는 둘이다.

이 문서는 1969년부터 2026년까지 NH투자증권의 성장 스토리와 지배구조 변화를 추적한다.

2. 두 개의 뿌리접기


2.1. 1969년 한보증권 : 손해보험사들이 세운 회사접기


NH투자증권의 법인 설립일은 1969년 1월 16일이다. 최초 사명은 한보증권주식회사였다. 국내 손해보험사들이 공동출자해 만든 증권사로, 설립과 함께 한국증권거래소 거래원으로 등록했다.

1971년 11월 증권 매매 신용공여 업무를 시작했고, 1975년 7월 생보증권을 흡수합병하면서 상호를 대보증권으로 바꾸고 기업공개를 마쳤다. 손해보험사가 세운 회사가 생명보험 계열 증권사를 합친 셈이다.

2.2. 1954년 대도증권 : 또 하나의 계보접기


한편 훗날 이 회사에 흡수될 또 하나의 증권사가 있었다. 1954년 8월 26일 설립된 대도증권이다. 대도증권은 같은 해 동방증권으로, 이듬해 한흥증권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6년 2월 충남방적 계열로 편입됐다가 1985년 11월 한일은행에 인수됐고, 1991년 1월 한일증권이 됐다.

한일증권은 1999년 1월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이 합쳐져 한빛은행이 출범하자 그해 3월 한빛증권으로 개칭했다. 2001년 3월 우리금융지주가 설립되면서 자회사로 편입됐고, 2002년 한빛은행이 우리은행으로 바뀌자 우리증권으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이 회사가 2005년 LG투자증권과 합쳐졌다.


3. 첫 번째 손바뀜 : 럭키금성 (1983)접기


3.1. 국제증권과 대보증권의 통합접기


럭키금성그룹은 1973년 국제증권주식회사를 세워 증권업에 발을 들였다. 1982년 7월 상호를 럭키증권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83년 11월 그룹은 대보증권을 인수해 럭키증권과 통합하고 통합 법인의 상호를 럭키증권으로 정했다.

이 통합에서 법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대보증권이다. 브랜드는 럭키증권이 이어받았지만 법인은 1969년 한보증권에서 시작한 쪽이 남았다. 이후 벌어질 두 차례 합병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사명은 인수하는 쪽 것을 쓰고 법인은 인수당하는 쪽이 존속하는 구조다.

3.2. 럭키증권에서 LG투자증권으로접기


럭키증권은 1984년 6월 해외 증권업 허가를 받았고 1986년 럭키경제연구원, 1988년 럭키투자자문을 세웠다. 1991년 런던, 1993년 뉴욕, 1995년 홍콩에 현지법인을 냈고 상하이·취리히·싱가포르에 사무소를 열었다.

1995년 3월 그룹 CI 통일에 맞춰 상호를 LG증권으로 바꿨다. 1998년 기준 총자산 1조7204억원, 자본금 3002억원, 종업원 1924명 규모였다. 1999년 10월에는 LG종합금융을 흡수합병하고 상호를 LG투자증권으로 변경했다. 증권사가 종합금융사를 합친 드문 사례였다.

2000년대 초 LG투자증권은 업계 최상위권이었다. 2006년 8월 기준으로도 자기자본이 업계 1위였고 2007회계연도 말까지 자기자본 2조원을 넘긴 증권사는 대우증권과 이 회사 둘뿐이었다.


3.3. LG카드 사태와 금융업 철수접기


2002년부터 터진 카드대란이 회사의 운명을 결정했다. LG카드가 유동성 위기에 빠지자 그룹은 계열 금융사를 동원해 지원에 나섰다. LG카드는 LG투자증권 지분 18.2%를 들고 있었다. 지원은 부실만 키웠다.

2003년 11월 LG투자증권은 산업은행과 함께 다중채무 신용불량자의 채무를 공동으로 조정하는 '상록수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카드 사태의 후속 처리였다.

결국 2004년 1월 LG그룹은 LG카드와 LG투자증권 지분을 채권단에 넘겼다. 그룹의 금융업 철수 결정이었다. LG투자신탁운용과 LG선물도 함께 매각 대상이 됐다.

4. 두 번째 손바뀜 : 우리금융 (2004~2014)접기


4.1. 2975억원의 인수접기


우리금융지주는 2004년 3월 25일 LG증권·한국투자증권·대한투자증권 중 한 곳을 인수하겠다고 공식화했다. 4월 6일 매각주관사인 산업은행에 인수의향서를 냈다.

5월 7일 입찰제안서 접수에는 우리금융, 미래에셋컨소시엄, 대만 유안타증권 등이 참여했다. 5월 14일 산업은행은 우리금융과 유안타증권을 복수 우선협상대상자로 뽑았다. 7월 7일 우리금융이 인수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7월 23일 유안타증권이 인수를 포기해 단독 협상 구도가 됐다.

9월 11일 가격과 경영권 보장 방안에 합의했고 9월 15일 우리금융 이사회가 LG투자증권 주식 2587만7487주 취득을 결의했다. 11월 26일 금융감독위원회가 자회사 편입을 승인했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LG카드 보유분 18.2%를 추가 매입해 지분율을 30% 이상으로 올리고 향후 우리증권과 합병하라는 것이었다.

2004년 12월 24일 우리금융은 2975억9110만원을 지급하고 주식 취득을 마쳤다. 첫 번째 손바뀜에서 21년이 지난 뒤였다.

4.2. 우리증권과의 합병 : 우리투자증권 출범접기


금융당국이 붙인 합병 조건은 곧 이행됐다. 2005년 2월 2일 양사 이사회가 합병을 결의하고 공시했다. 합병비율은 우리증권 1주당 LG투자증권 0.654주였다. 3월 1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승인됐고 4월 1일 합병기일을 맞았다.

존속법인은 LG투자증권, 소멸법인은 우리증권이었다. 1969년 한보증권 계보가 다시 살아남고 1954년 대도증권 계보가 소멸했다. 사명은 우리투자증권으로 정해졌다.


4.3. 자기자본 1위 증권사접기


우리투자증권은 업계 선두권 자리를 차지했다. 2008년 2분기에는 분기 순이익이 삼성증권을 넘어 업계 1위를 기록했다. 2013년 3월 말 기준 자기자본은 3조4783억원으로 대우증권에 이어 업계 2위였다.

사고도 있었다. 2011년 부산 수영지점 등 두 개 지점에서 지점장이 고객 증권카드를 이용해 여덟 차례에 걸쳐 13억90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2013년 4월 금융감독원 검사에서 드러났다.

금감원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이 회사에서 일곱 건의 금융사고가 있었다고 밝혔다. 2008년 코스닥 종목 '루보' 미수거래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증권사 책임이 일부 인정됐고, 파워인컴펀드와 LIG건설 기업어음 불완전판매를 둘러싼 소송도 이어졌다.

4.4. 민영화가 부른 세 번째 손바뀜접기


2013년 6월 26일 정부는 우리금융 민영화 방안을 확정했다. 은행·지방은행·증권 세 그룹으로 나눠 파는 분리매각이었다. 당시 우리금융이 보유한 지분은 우리투자증권 37.85%, 우리파이낸셜 52.02%, 우리아비바생명 51.58%, 우리자산운용과 우리금융저축은행 각 100%였다.

8월 16일 증권 계열 패키지 매각 공고가 났다. 우리투자증권에 우리아비바생명·우리자산운용·우리금융저축은행을 묶은 구성이었다. 10월 21일 예비입찰에 KB금융지주, NH농협금융지주, 사모펀드 파인스트리트가 참여해 3파전이 됐다. 12월 16일 본입찰을 거쳐 12월 24일 NH농협금융지주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자산운용은 패키지에서 빠져 별도로 키움증권에 넘어갔다.

가격 협상은 순탄하지 않았다. 2014년 4월 우리투자증권이 프랑스 프로젝트파이낸싱 투자 관련 소송 1심에서 패소해 500억원 규모의 우발채무가 생겼다. 패소가 확정되면 우리금융이 사후에 손실을 공제해 주는 조건으로 절충이 이뤄졌다.

2014년 4월 11일 주식매매계약이 체결됐다. 우리투자증권·우리아비바생명·우리금융저축은행 3사에 대한 총 인수금액은 1조385억원이었다. 6월 3일 금융위원회가 자회사 편입을 승인하고 6월 27일 편입이 완료됐다.

5. 세종증권 계보 : 농협의 첫 증권사 (2006)접기


5.1. 고려투자금융에서 세종증권까지접기


농협은 우리투자증권을 인수하기 8년 전에 이미 증권사를 갖고 있었다. 그 회사의 법인 설립일은 1982년 11월 11일, 최초 사명은 고려투자금융주식회사였다. 동아그룹 계열이었다.

1988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1991년 동아증권으로 상호를 바꾸며 증권업으로 전환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동아그룹이 흔들리자 김형진 회장의 세종그룹이 인수했고, 1998년 7월 세종증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5.2. 1100억원의 인수와 매각 로비 사건접기


2005년 12월 27일 농협과 세종증권 최대주주 세종캐피탈이 인수 양해각서를 맺었다. 2006년 1월 16일 농림부가 인수를 승인하고 1월 28일 주식매매 본계약이 체결됐다. 인수가는 약 1100억원, 주가순자산비율 1.6배 수준으로 알려졌다. 인수 직후 사명은 NH투자증권으로 바뀌었다.

이 인수는 2년 뒤 대형 정치 스캔들의 진원지가 됐다.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에게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도와달라며 금품을 건넸다는 것이 골자였다. 여기에 당시 농협중앙회장 정대근에 대한 별도의 로비 자금 의혹, 태광실업 회장 박연차가 인수 확정 직전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세종증권 주식을 사고팔아 178억원의 차익을 거뒀다는 의혹이 얽혔다.

2008년 하반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로 사건이 터졌다. 11월 23일 홍기옥, 11월 24일 브로커 역할을 한 정화삼·정광용 형제, 12월 4일 노건평씨, 12월 12일 박연차가 차례로 구속기소됐다. 노건평씨는 알선수재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받았고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추징금 3억원으로 감형돼 2010년 1월 14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정대근 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10년을 받았으나, 항소심은 세종증권 관련 50억원 뇌물수수 혐의 자체를 증거 부족으로 무죄로 판단했다. 다른 혐의만 인정돼 징역 5년으로 감형됐고 2011년 1월 27일 확정됐다. 세종증권 매각 대가로 농협 측이 돈을 받았다는 혐의는 최종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박연차는 조세포탈 등으로 파기환송을 거쳐 징역 2년6월·벌금 291억원이 확정됐다.

이 사건은 이후 박연차의 전방위 정·관계 로비 의혹으로 확대됐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이어진 수사의 발단이 됐다.

*정대근 전 회장

5.3. NH투자증권에서 NH농협증권으로접기


2011년 농협법이 개정돼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할 근거가 마련됐다. 2012년 1월 31일 NH투자증권 이사회는 사명을 NH농협증권으로 바꾸기로 결의하고 공시했다. 사유는 NH농협금융지주 출범이었다. 3월 2일 신경분리로 NH농협금융지주가 출범하면서 증권사는 신설 지주의 자회사로 편입됐고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정관 변경이 반영돼 상호가 NH농협증권으로 확정됐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짚어둘 필요가 있다. NH투자증권이라는 이름을 내려놓은 것은 우리투자증권 인수와 무관하다. 개칭은 2012년 3월, 우리투자증권 매각 공고는 2013년 8월이다. 1년 반의 시차가 있다. 지주사 출범에 맞춘 브랜드 정비였고 그 결과 'NH투자증권'이라는 이름이 비어 있었기에 2년 뒤 통합 법인이 그 이름을 다시 쓸 수 있었다.

6. 세 번째 손바뀜 : 농협금융 (2014)접기


6.1. 업계 12위가 업계 2위를 품다접기


2014년 합병은 규모의 역전이 뚜렷했다. NH농협증권은 2013년 자기자본 기준 업계 12위의 중형사였다. 지방 소매와 공공·농업금융에 특화된 회사였다.

반면 우리투자증권은 3조4783억원의 업계 2위였다. 통합 법인의 자기자본은 4조3000억원이 됐다. 작은 쪽이 큰 쪽을 사 큰 쪽의 법인을 살리고, 작은 쪽의 브랜드를 붙인 거래였다.


6.2. 2014년 12월 30일 : NH투자증권 출범접기


2014년 10월 17일 금융위원회는 제18차 정례회의에서 두 회사의 합병을 인가했다. 합병 방법은 우리투자증권이 NH농협증권을 흡수합병하는 것이었고, 합병비율은 NH농협증권 1주당 우리투자증권 약 0.687주였다. 합병 예정일은 12월 30일이었다.

11월 4일 우리투자증권은 임시주주총회 소집을 공시했다. 안건은 합병계약서 승인과 김원규 대표이사의 이사 선임이었다. 12월 17일 주주총회에서 승인됐고 12월 30일 합병기일을 맞았다. NH농협증권은 소멸했다. 통합 법인은 2015년 1월 1일부터 NH투자증권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출범 당시 총자산 42조5820억원, 자기자본 4조2925억원으로 자기자본 업계 1위였다. 다만 이 지위는 2년을 못 버텼다. 2016년 말 미래에셋증권과 대우증권이 합쳐진 미래에셋대우가 출범하면서 1위를 내줬다.

7. 통합 이후 : 세 명의 사장과 두 개의 사건접기


7.1. 김원규 : 초대형 IB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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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법인의 초대 대표는 김원규였다. 우리투자증권 대표로 있다가 그대로 통합 법인을 맡았다. 우리투자증권 시절을 포함해 4년8개월을 재임했다.

임기 말인 2017년 11월 회사는 초대형 투자은행으로 지정됐다. 한국투자증권·미래에셋증권·KB증권·삼성증권과 함께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요건을 채운 첫 5개사였다. 김원규는 2019년 이베스트투자증권으로 옮겼다.

7.2. 정영채 : 발행어음과 옵티머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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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정영채가 2대 대표로 취임했다. IB사업부문 대표 겸 부사장에서 올라온 인사였다. 대우증권 출신으로 2005년 우리투자증권에 합류해 IB를 키운 인물이다. 취임 직후인 2018년 5월 회사는 발행어음(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았다. 한국투자증권에 이어 두 번째였다.

정영채는 연임에 성공해 6년을 재임했다. 그 기간에 옵티머스 사태가 터졌다. 회사는 2019년 6월부터 2020년 5월까지 투자자 1360명에게 옵티머스 펀드 6794억원을 팔았다. 전체 환매중단 규모의 80%를 넘는 최대 판매사였다. 2020년 6월 금감원 검사 예고와 함께 환매가 중단됐다.

2021년 3월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개인투자자 2건에 대해 '착오에 의한 계약취소'를 결정했다. 사실상 전액 배상이다. 회사는 수탁은행인 하나은행, 사무관리사인 예탁결제원과 책임을 나누는 다자배상을 역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2021년 자체 방식으로 일반투자자 831명에게 원금 2780억원을 지급했다.

제재가 이어졌다. 2022년 3월 금융위원회는 회사에 업무 일부정지 등을 부과했다. 부당권유 금지의무 위반 판단이었다. 2023년 11월에는 정영채 당시 대표에게 문책경고가 확정됐다. 연임 불가와 3~5년 금융권 취업 제한이 따르는 중징계다. 2024년 3월 4일 정영채는 주주총회 후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반전은 2년 뒤에 왔다. 2026년 4월 대법원은 정영채 전 대표에 대한 문책경고 취소를 확정했다. 같은 달 16일에는 회사에 대한 업무 일부정지 제재도 취소 판결이 났다. 부당권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사태 발생 7년 만에 행정제재가 전부 무효화된 것이다.

다만 민사책임은 남았다. 2026년 5월 오뚜기가 제기한 소송에서 75억원, JYP엔터테인먼트 소송에서 15억원의 배상이 확정됐다. 설명의무 위반이 인정됐다. 행정제재는 취소됐지만 투자자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은 유지되는 이원적 결과가 됐다.

7.3. 윤병운 : 최대 실적과 연임 불발접기




2024년 3월 27일 윤병운이 3대 대표로 취임했다. 1993년 LG투자증권에 입사해 우리투자증권과 NH투자증권을 거친 정통 IB맨이다. 회사의 손바뀜을 내부에서 겪은 인물이다.

취임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이사회가 후보를 검토하던 2024년 3월 농협중앙회 부회장 출신 인사가 함께 거론돼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금융감독원은 3월 7일 NH농협금융지주와 농협은행에 수시검사, 3월 8일 NH투자증권에 정기검사를 착수했다. 자회사 인사 개입에 대한 압박으로 해석됐다.

재임 중 실적은 뚜렷했다. 2025년 회사는 영업이익 1조4206억원, 당기순이익 1조315억원을 기록했다. 창사 이래 최대이자 첫 순이익 1조원 돌파였다. 2023년 5530억원, 2024년 6866억원에서 2년 만에 두 배가 됐다.

2026년 3월에는 한국투자증권·미래에셋증권에 이어 세 번째로 종합투자계좌(IMA) 사업자 인가를 받았다. 6월에는 IMA 경쟁력 강화를 위해 NH농협금융지주를 대상으로 약 4000억원의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 증자로 지주의 지분율은 57.54%에서 61.94%로 올랐다.

그러나 연임엔 실패했다. 2025년 10월 IB 고위임원이 상장사 공개매수 관련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혐의로 검찰 압수수색을 받았다. 2026년 1월 증권선물위원회가 담당 직원을 검찰에 고발했고 5월에는 전직 임원과 배우자·지인 등 8명을 추가 고발했다. 4월에는 회사채 업무 내부통제 미흡으로 금감원의 경영유의 조치를 받았다.

윤병운은 2월 대표이사 직속 내부통제 강화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직접 팀장을 맡았지만, 6월 임원후보추천위원회 숏리스트에서 제외됐다.

7.4. 각자대표 체제접기


*(왼쪽부터)신재욱, 배광수 각자대표

2026년 6월 3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신재욱과 배광수가 각자대표이사로 선임됐다. 2014년 통합 이후 첫 각자대표 체제다. 신재욱 대표가 IB를, 배광수 대표가 자산관리(WM)를 맡는 구조다. 신재욱 대표는 2017년 회사에 합류한 부동산금융 전문가로 파크원 프로젝트파이낸싱을 주도했고, 배광수 대표는 WM 부문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2026년 상반기 회사는 영업이익 1조3179억원, 지배주주 순이익 9652억원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6월 말 개별 자기자본은 9조8181억원으로 한국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에 이어 업계 3위다.

8. 손바뀜이 남긴 것접기


8.1. 법인은 하나, 뿌리는 둘접기


세 차례의 손바뀜에서 일관된 패턴이 하나 있다. 사명은 사는 쪽 것을 쓰고 법인은 팔리는 쪽이 존속했다. 1983년 럭키금성이 대보증권을 사서 럭키증권이라 이름 붙였을 때, 2005년 우리금융이 LG투자증권을 우리투자증권으로 바꿨을 때, 2014년 농협이 우리투자증권에 NH투자증권 이름을 붙였을 때 모두 그랬다. 그래서 이 회사의 법인 설립일은 57년 동안 1969년 1월 16일로 고정돼 있다.

인수당한 쪽이 소멸한 계보도 둘이다. 1973년 국제증권(럭키증권)과 1954년 대도증권(우리증권), 그리고 1982년 고려투자금융(NH농협증권)이다. 특히 세종증권 계보는 농협이 직접 8년간 키운 회사였는데도 법인이 사라졌다. 농협이 자기가 갖고 있던 증권사를 소멸시키고 새로 산 회사를 살린 것이다. 규모 차이가 그만큼 컸다.

8.2. 농협계가 아닌 사장들접기


통합 이후 대표이사 인선에서 반복된 구도가 있다. 최대주주는 NH농협금융지주이고 그 위에는 농협중앙회가 있지만, 대표 자리에는 농협 출신이 앉지 못했다. 김원규·정영채·윤병운은 모두 우리투자증권 계보다. 2024년과 2026년 두 차례 인선에서도 농협중앙회 출신 인사가 거론됐으나 모두 관철되지 않았다.

이 구도는 실적과 무관하지 않다. NH투자증권이 NH농협금융지주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12.2%에서 2024년 14.1%, 2025년 21.6%로 커졌다. 그룹 내 발언권이 커지는 만큼 중앙회의 개입 유인도 함께 커지는 구조다. 대표 교체기마다 같은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다.

8.3. 남은 과제접기


내부통제가 당면 과제다. 역대 최대 실적을 낸 대표가 연임하지 못한 이유가 성과가 아니라 통제 실패였다. 미공개정보 이용 사건은 2026년 9월 현재도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옵티머스 사태의 경우 행정제재가 대법원에서 취소된 것은 회사에 유리한 결과지만, 그 사건으로 6년 재임한 대표가 물러났고 2780억원을 지급했으며 발행어음 이후 다음 단계 인가가 늦어졌다는 사실은 남는다.

자기자본 업계 3위라는 위치도 애매하다. 통합 당시 1위였던 자리를 미래에셋대우에 내준 뒤 한국투자증권까지 앞서 나갔다. 2026년 IMA 인가로 자본 확충의 명분은 생겼지만 최대주주가 농협금융지주 한 곳뿐인 구조에서 증자는 결국 지주의 결정에 달려 있다. 세 번의 손바뀜을 거쳐 정착한 회사가 네 번째 주인을 만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자본 조달의 속도는 여전히 주주에게 묶여 있다.
  • [1]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등록된 NH투자증권의 설립일이 1969년 1월 16일이다. 이 날짜는 이후 모든 합병에서 이 법인이 존속법인이었음을 뜻한다. 2005년 우리증권과의 합병, 2014년 NH농협증권과의 합병 모두 이 법인이 살아남았다.
  • [2] 1983년 통합의 존속법인이 어느 쪽인지는 자료가 엇갈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은 럭키증권이 대보증권을 흡수한 것으로 서술하는 반면 일각에선 대보증권이 존속한 것으로 본다. 다만 현재 NH투자증권의 DART 등록 설립일이 1969년 1월 16일(한보증권 설립일)이라는 사실은 대보증권 계보가 법적으로 존속했음을 뒷받침한다. 1973년 설립된 국제증권 계보가 존속법인이었다면 설립일이 1973년으로 기재돼 있어야 한다.
  • [3] 당시 시가총액으로는 삼성증권 3조4300억원, 대우증권 2조6300억원에 이어 2조5443억원으로 3위였다.
  • [4] 부실의 발단이었던 LG카드는 산업은행 관리를 거쳐 2006년 신한금융지주에 인수돼 신한카드가 됐다.
  • [5] 동아그룹은 별도로 1958년부터 1969년까지 동명증권을 운영한 이력이 있으나 별개 법인이다.
  • [6] 오뚜기는 총 150억원을 투자했다. 1심은 전액을, 2심은 60% 책임을 인정했고 대법원에서 75억원으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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