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THECFO가 제공하는 '아카이브(Archive)'는 시장에서 벌어진 이슈의 발단과 결말을 기록한다. 기업의 현재를 만든 이정표적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됐을까. 사건의 방향성을 흔들어 놓은 주요 이벤트는 뭘까. 기사 한 건이 하나의 조각이라면 아카이브는 조각이 맞춰진 퍼즐이다. 거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관계를 아카이브가 담았다.
현대건설의 역사는 한국 건설산업의 역사와 겹친다. 1947년 서울 초동의 자동차수리공장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내건 작은 토건회사는 전후 복구와 경제개발 시기를 거치며 국내 1위 건설사가 됐다. 경부고속도로와 고리원전과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서산간척지 등 한국 산업화의 주요 현장 대부분에 현대건설이 있었다.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사 해외 진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966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로 첫 해외 수주를 따냈고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초기 중동 건설 붐을 이끌었다. 2013년에는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처음으로 해외 수주 누계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성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쌓인 유동성 위기로 2000년 한 해에만 2조9800억원의 손실을 냈다. 2001년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면서 창업주 일가의 손을 떠났다. 5년여의 워크아웃을 거쳐 2006년 정상화했고 2011년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되며 다시 '현대'의 울타리로 돌아왔다.
창립 80주년을 앞둔 현대건설은 또 한 번 사업 구조를 바꾸고 있다. 주택과 플랜트 중심이던 사업의 무게중심을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사업으로 옮기는 중이다. 대형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 사업은 반세기 전 고리1호기 하도급 공사에서 시작된 기술 축적의 연장선에 있다.
이 문서는 현대건설의 80년 가까운 시간을 주요 사업과 전환점 중심으로 살펴본다. 성장과 위기와 재기를 거쳐온 과정이 한국 건설산업에 남긴 의미도 함께 짚어본다.
1947년 5월25일 서울 중구 초동 106번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입구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이 걸렸다. 당시 33세였던 정주영 사장이 토건업에 뛰어든 것이다.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이 관련 시설 공사를 대거 긴급 발주하면서 업계도 호황이었다. 처음엔 신건공영·황진토건·삼환기업 등 3대 토건사를 비롯한 일부 종합건설업체(제너컨)가 물량 대부분을 가져갔지만 곧 이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사가 쏟아졌다.
현대토건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더부살이로 출발했다가 얼마 뒤 광화문 평화신문사 사옥에 사무실을 따로 냈다. 당시 인력은 공업학교 교사 출신 기술자 1명과 기능공 10여명이 전부였다. 30여명으로 출발한 현대자동차공업사보다 훨씬 작았고 호황을 타고 서울에만 3000여 곳이 난립한 토건회사 가운데서도 눈에 띄지 않는 규모였다. 그런데도 설립 첫해인 1947년 계약고 153만원을 올렸다. 대부분 정주영 사장의 인맥과 수완으로 따낸 일이어서 이익은 크지 않았지만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 무난히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준 실적이었다.
전환점은 정부의 국토 건설 투자였다. 정부는 1949년 경제부흥 5개년계획을 세워 이듬해부터 본격 시행을 준비했고 미국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전국에 걸친 건설 투자에 나섰다. 도로·교량, 학교 같은 공공건축물, 농지·수리시설의 보수와 건설 공사가 잇따랐다.
현대토건은 1950년 1월10일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늘어나는 건설 수요에 더 빠르게 대응하려고 사업을 키우고 체제를 정비한 것이다. 현대건설은 정관 사업목적에 토목·건축·교량·삭도의 설계·시공과 이에 딸린 부수사업 일체를 넣어 종합건설사의 모습을 갖췄다. 발행주식은 총 3만주, 주당 액면가는 1000원으로 자본금은 3000만원이었다. 창립발기인으로는 정주영 사장을 비롯해 7명이 참여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해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피란길에 오른 정주영 사장은 건설 공구와 자재와 자동차수리 시설은 모두 서울에 두고 떠났다. 공사는 전부 중단됐고 임직원 대부분은 흩어졌다.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출범한 지 6개월여 만이었다.
현대건설은 부산에 도착한 직후 미8군과 접촉해 후방기지사령부 공사를 수주했다. 교통부·외자청과는 외자보관창고 건설 및 창고보관 대행 계약을 맺었다. 이를 위해 현대상운주식회사를 따로 세우고 연면적 약 7164㎡(2167평) 규모 창고 3동을 지어 창고업에 진출했다.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세운 첫 계열사였다.
이 시기 주요 공사로는 서울대 법대·문리대 건물을 고친 미8군 전방기지사령부 막사와 미8군 제8029부대가 발주한 부평조병창 보충부대 막사와 수원 공군기지 복구공사가 있다. 수원 공군기지 공사는 1·4후퇴로 중단돼 공기가 늦어졌다. 나머지 공사 대부분에서는 높은 수익을 냈다.
1·4후퇴로 다시 부산에 내려간 뒤에도 현대건설은 현대상운과 함께 부산 영업을 재개했다. 초량에 공장을 마련해 자동차수리업도 다시 시작했다. 미군 막사 건설과 함께 해당 시설의 난방·청소 같은 유지관리 용역도 맡았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전까지 미군 일감의 대부분이 현대건설에 돌아갔다. 정부 발주 긴급 복구공사에도 참여했다. 상주와 삼천포를 잇는 상현교와 동해선 월천교·흥만교와 논산대교와 성북교와 광상리수원지 복구공사 등이다.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 복구공사 완공 당시 모습 (출처: 현대건설)
전후 최대 공사는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 복구공사였다. 1957년 9월 착공해 이듬해 5월 완공했고 계약금액은 2억3000만환이었다. 이 무렵 1000여개 업체 가운데 6대 건설업체에 들었다. 6대 업체는 1960년 4·19혁명 직전까지 정부 발주 공사 대부분을 나눠 맡았다. 현대건설의 국내 공사 계약고는 1954년 1억5800만환에서 1957년 10억9000만환으로 늘었고 1959년에는 20억800만환을 기록했다.
주한미군 발주 공사도 늘었다. 현대건설은 전쟁 전후 미군 공사 경험과 6대 건설업체 지위를 바탕으로 60% 이상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주한미군을 상대로 한 수주액은 1957년 171만달러에서 1958년 96만달러로 줄었다가 1959년 281만달러로 늘었다. 주요 공사는 의정부 저수지 배관·동두천 상수도·오산비행장 활주로 포장·군산 장교숙소(BOQ) 신축·인천 제1도크 복구·오산 병사 7동 건축공사 등이다. 이 가운데 1959~1960년 진행한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는 계약금액 119만달러로 건국 이후 최대 규모였다.
현대건설은 1961년 1월 서울 무교동에 사옥을 새로 지어 옮겼다. 1947년 10여명으로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더부살이를 시작한 지 13년여 만에 마련한 첫 사옥이다. 사업 확장과 인력 충원에 따라 경영조직이 세분화되던 시기였다. 사옥 이전으로 늘어난 조직을 한 공간에 둘 수 있게 됐다.
같은 해 7월 정부는 경제기획원을 설치하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은 이듬해부터 시행됐다. 1962~1966년 계획 기간 국민총생산(GNP)은 연평균 7.7% 성장했다. 같은 기간 건설업 성장률은 17.4%를 웃돌아 경제 전체 성장률의 두 배를 넘었다.
현대건설은 1953년 정전협정부터 1961년까지 8년여간 사업 기반을 닦았다.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된 이후에는 사업 규모를 키우는 단계에 들어갔다. 주력인 토목 분야를 중심으로 전기·플랜트·건축 분야 시공 능력을 늘렸다. 이 과정에서 국내 1위 종합건설업체로 올라섰다.
이 시기 토목 분야는 장대교량과 댐과 항만 공사가 중심이었다. 현대건설은 1950년대 고령교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1962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건설에 착공했다. 길이 1048m 폭 18m 규모다. 이 공사를 계기로 장대교량 공사 수주를 늘렸다. 이후 한강의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와 서울대교(현 마포대교)를 시공했고 강화교·거제교·남해대교 등 연륙교 공사도 맡았다.
1960년대 후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막바지의 중점 사업은 전국 고속도로망 구축이었다. 건설부는 1967년 11월 서울을 중심으로 총연장 1592.5km의 고속도로를 짓는 고속도로 10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중심 사업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였다. 공사는 1968년 2월1일 첫 구간인 서울~수원 시범구간에서 시작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국내 건설사 16곳과 육군 공병대대 3곳이 참여했다. 투입 인원은 연인원 900만명이었다. 중장비 165만대와 시멘트 680만포와 아스팔트 47만드럼과 철근 5만톤이 들어갔다. 현대건설은 4차선 총연장 428km 가운데 약 30%인 128km 구간을 시공했고 기술 측면에서도 공사를 주도했다.
조사설계비·보상비·외국인용역비를 뺀 순공사비는 379억3300만원이었다. 이 가운데 현대건설 도급액은 87억9600만원으로 약 23%를 차지했다. 현대건설의 공사이익은 3억3100만원으로 이익률은 3.76%에 그쳤다. 정주영 사장은 당시 경부고속도로에서만큼은 기업의 이해득실을 초월해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건설에 임했다고 전해진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개통했다. 개통 이후 포화 상태였던 경부선 철도의 수송 부담이 줄었다. 도로 수송능력도 크게 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대 경제 성장기 국가 물류의 주축 역할을 했다.
정부는 1972년 주택건설 10개년계획을 수립해 시행에 들어갔다. 1981년까지 주택 250만호를 공급해 50%를 밑돌던 도시 주택보급률을 90% 가까이 올린다는 계획이었다. 인구의 도시 집중이 빨라지면서 단독주택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국토가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 공동주택 공급이 필요했다.
현대건설은 1961년 착공해 1964년 완공한 마포아파트 건설에 참여했다. 6층 10개동 612세대 규모로 국내 첫 대단지 아파트다. 마포아파트에 이어 힐탑외인아파트를 지었다. 1976년 1월 착공해 이듬해 10월 완공했다. 11층 높이로 국내 첫 고층 아파트다. 이어 12층 규모의 여의도 시범아파트 건설에도 참여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출처: 현대건설)
현대건설은 1975년 4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에 착수했다. 1987년까지 12년간 14차에 걸쳐 6150여세대를 지었다. 당시 압구정동 일대는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모래밭이었다. 현대아파트 건설 이후 이 일대는 고급 주거단지로 바뀌었고 강남 개발도 빨라졌다.
공사는 한 차수가 끝나면 다음 차수가 바로 시작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현대건설은 주택사업부 주도로 1976년 6월까지 1·2차 960세대를 지었다. 1976년 3월에는 아파트사업을 전담할 한국도시개발주식회사를 따로 세웠다. 한국도시개발은 3차분 432세대를 시작으로 1987년 14차까지 사업을 이어갔다.
1970년대 말부터 강남 부동산 가격 상승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이끌었다. 여러 건설사가 주변에 잇따라 아파트를 공급하면서 강남 아파트값이 급등했다. 현대아파트는 새 차수 모델하우스를 공개할 때마다 인근 교통이 마비될 만큼 사람이 몰렸다. 분양가는 주변 아파트보다 높았지만 모두 분양됐다. 이 과정에서 '현대아파트'는 아파트를 가리키는 대표 브랜드가 됐다. 현재 현대아파트의 새로운 이름은 '힐스테이트'다.
1973년 10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중동 산유국들이 일제히 감산에 들어가면서 유가가 급등했다. 제1차 오일쇼크는 국내 경제에도 타격을 줬다. 물가상승률은 1973년 3.5%에서 이듬해 24.8%로 뛰었다. 경제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성장세가 꺾이면서 국내 민간 건설 수요 확대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유가 급등으로 늘어난 오일달러는 산유국으로 들어갔다. 중동 국가들의 경기가 살아나면서 건설 수요가 크게 늘었다. 정부는 국내 노동력을 중동 건설 현장에 보내 외화를 버는 방안을 검토해 1975년 12월 '대중동 진출 방안'을 발표했다. 현대건설은 이보다 1년여 앞선 1975년 1월 이란에 지점을 내고 수주에 나섰다.
중동 첫 수주는 이란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조선소 건설공사였다. 이란이 조선기능공 양성용 소규모 조선소 설립을 검토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추진했다. 발주처 PGSC(Persian Gulf Shipbuilding Corp.)는 설계와 시공을 모두 현대건설에 맡겼다.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이었고 현대건설의 첫 해외 턴키 수주였다. 1975년 8월 800만달러에 계약했다. 이후 공사가 추가돼 1976년 12월 1027만달러 규모로 완공했다.
두 번째 수주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회사(ASRY) 조선소 건설공사였다. ASRY는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 10개 회원국 가운데 7개국이 30억달러를 공동 출자해 세운 회사다. 총공사금액은 1억3700만달러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대형 공사 발주가 가장 많아 세계 주요 건설사들이 경쟁하던 시장이었다. 현대건설은 1975년 사우디 국방성이 발주한 1억9000만달러 규모 해군기지 확장공사를 수주했다. 1976년 6월에는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를 따냈다. 총공사금액은 9억6000만달러였다.
1970년대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수행한 공사의 약 35%는 사우디 발주였다. 이라크·리비아·이란·알제리·쿠웨이트·UAE가 뒤를 이었다. 공종별로는 특수 플랜트가 약 30%로 비중이 가장 컸다. 건축·토목·전기 부문 공사도 수행했다.
현대건설은 1976년 1월 종로구 세종로 178번지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1961년 시작된 무교동 사옥 시기는 15년 만에 끝났다. 신사옥에는 현대건설을 비롯해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현대시멘트·현대종합기술개발·현대미포조선 등 7개 계열사가 입주했다. 이후 세종로 사옥은 현대그룹 사옥 역할을 했다.
1960년대 말 두 차례 경제개발계획을 거치며 국내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산업화와 생활수준 향상으로 에너지 수요도 크게 늘었다. 정부는 기존 화력·수력발전보다 발전 단가가 낮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원전 건설 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제2차 전원개발계획이 시행되던 1967년 무렵이다. 정부는 수정 중이던 전원개발계획에 원전 건설을 정식 사업으로 넣고 부지 선정에 들어갔다. 1968년 4월 현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 일대를 국내 첫 원전 부지로 확정했다.
한국전력은 1970년 7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고리1호기 건설 계약을 맺었다. 웨스팅하우스가 기본설계와 1차 계통 주기기 설치와 시공·공정관리 전반을 맡는 턴키 방식이었다. 국내 업계에 관련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 건설사는 웨스팅하우스의 하도급을 받아 단순 시공을 맡았다. 참여 업체는 현대건설을 포함해 3곳이었다.
고리1호기 총사업비는 내·외자를 합쳐 1560억7300만원이었다. 현대건설이 맡은 공사는 1차 계통 단순 시공 63억3000만원 규모였다. 현대건설은 원전 경험은 없었지만 화력발전소 시공 실적은 국내에서 가장 많았다. 현대건설은 고리1호기 참여의 목적을 원전 시공기술 국산화에 뒀다.
공사는 1971년 3월 착공해 1978년 7월 완공했다. 당초 60개월이던 공기는 88개월로 늘었다. 현대건설은 거의 모든 공정을 외국 기술진의 통제와 감독 아래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원전 건설에 필요한 안전·품질 절차를 익히고 원자로 계통 시공 기술을 쌓았다.
현대건설은 이후 고리2호기와 고리3·4호기와 한빛1·2호기 건설에 참여하며 공사 범위를 넓혔다. 1996년 1월 준공한 한빛3·4호기부터는 시공기술을 자립했다. 한빛3·4호기는 미국 전문지 '파워 엔지니어링(Power Engineering)'이 선정한 1995년 올해의 프로젝트상을 받았다. 국내 원전 가운데 처음으로 3년간 무고장·무사고 운전을 기록했다.
중동 진출 이후 현대건설의 외형은 빠르게 커졌다. 총자산은 1976년 1967억원에서 1980년 9723억원으로 5배 가까이 늘었다. 자산 1조원을 눈앞에 둔 규모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국내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시기였다.
인력도 크게 늘었다. 임직원 수는 1975년 1136명에서 1980년 6960명으로 6배 넘게 증가했다. 증가분 대부분은 해외 근무 인원이었다. 해외 근무 인원은 1975년 191명에서 1980년 2201명으로 늘어 전체 임직원의 31.6%를 차지했다.
외형이 커지면서 경영조직과 인사·노무관리와 해외업무 지원체계와 교육·복지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생겼다. 가장 먼저 늘어난 것은 임원 수다. 임원은 1975년 31명에서 1976년 39명과 1977년 63명과 1978년 85명을 거쳐 1979년 102명이 됐다. 증가세는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늘어난 업무를 분야별로 맡기기 위해서였다. 현대건설은 내부 승진과 함께 외부 인사 영입도 병행했다.
현대건설은 1983년 10월 세종로 사옥을 떠나 종로구 계동 사옥으로 이전했다. 사업 확장으로 조직과 직원 수가 늘어 기존 사옥으로는 수용이 어려웠다. 계동 사옥은 약 3만3719㎡(1만200평) 대지에 지하 3층 지상 12층 연면적 약 6만6115㎡(2만평) 규모로 지어졌고 이후 2개 층을 증축했다. 층수는 세종로 사옥(16층)보다 낮지만 사용 면적은 세 배 이상 넓다.
현대건설은 1977년 무렵 정주영 회장 주도로 서산간척사업 검토에 들어갔다. 간척에 성공하면 여의도의 30배이자 남한 면적의 1%인 1만5900ha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공사비가 수천억원으로 예상돼 정부와 회사 내부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1978년 11월 매립 허가를 받았지만 정치 상황이 불안해 착공은 1982년으로 미뤄졌다.
사업지는 약 6.5km 방조제가 필요한 A지구와 약 1.2km 방조제가 필요한 B지구로 나뉘었다. 1982년 4월 시작한 B지구 공사는 6개월간 연인원 12만명을 투입해 6280ha 매립지를 확보했다. 1983년 7월 시작한 A지구는 매립 면적 9663ha에 예상 공기는 45개월이었다. 조수량과 유속이 커 일반 공법으로는 20톤 이상의 돌이 필요했다. 정 회장은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은 뒤 흙과 버력으로 물막이를 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현대건설은 1984년 2월25일 22만6000톤급 유조선 워터베이호를 투입해 끝막이를 하고 13일 만에 방조제를 완성했다.
이 공법으로 공사비 280억원을 아끼고 공기를 36개월 단축했다. 총사업비는 1926억원이다. 정지·제염 작업을 거쳐 1995년 8월 준공인가를 받았다. 확보한 농경지는 약 1만580ha이며 현대서산농장은 매년 쌀 4만7780톤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건설업계는 1980년대 중반 저유가로 중동 건설 경기가 위축되면서 성장세가 꺾였다. 1986년 국내 건설공사 총액은 약 7조4700억원으로 전년 대비 14% 늘었다. 반면 해외 건설공사 수주액은 22억3900만달러로 해외 진출 본격화 이후 최저치였다. 현대건설은 1986년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동남아 시장에 진출했고 파푸아뉴기니·파키스탄 등으로 시장을 넓혔다. 1988년에는 일본 건설업 면허를 취득해 도쿄 이스트-21(EAST-21)과 요코하마 쓰루미 체육관 공사를 수주했고 미주 시장 공략도 재개했다.
같은 시기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소련과 동구권과 중국 등 북방 시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9년 1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시베리아 극동 지역 자원 개발과 항만 건설 등 경제협력을 논의하고 경협설치의향서를 교환했다. 같은 달 23일에는 현대건설 대표단을 이끌고 분단 이후 경제인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대표단은 금강산 공동 개발과 시베리아 극동 지역 공동 진출 원칙에 합의해 의정서를 교환했다. 하지만 김일성 사후 남북 관계가 냉각과 해빙을 반복하면서 1990년대 후반까지 추가 진전은 없었다.
북방 시장 성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정 명예회장은 한·중 수교 전인 1991년 중국을 방문했고 1994년 중국 총리 일행의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방문을 계기로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본격화했다. 현대건설은 소련 해체 이후인 199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비즈니스사와 호텔 신축공사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우즈베키스탄에도 진출했다.
1980년대 중반 중동 건설 시장이 위축된 이후 현대건설이 가장 공을 들인 신흥 시장은 동남아시아였다. 현대건설의 첫 해외 공사도 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였다. 중동 붐 시기에도 말레이시아 케냐르 다목적댐과 미얀마 나웅카트 다목적댐 등을 수행했다. 동남아는 미국·일본·유럽 건설사가 경쟁하는 시장이었다. 현대건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홍콩·필리핀·인도·파키스탄으로 시장을 넓혔다.
홍콩에서는 1985년 11월 6200만달러 규모 타이워 주택단지 공사를 처음 수주했고 칭이 주택단지와 하버로드 정부청사 외벽 공사를 이어 맡았다. 필리핀에서는 아시아개발은행(ADB) 본점 신축공사를 4595만달러에 수주해 1991년 8500만달러 규모로 마무리했다. 말레이시아 페낭대교와 인도네시아 바탐 공항 공사도 수행했다. 인도에서는 나바쉐바 항만 지상건설공사를 맡았고 파키스탄에서는 국가 전력의 50%를 차지하는 173만kW 규모 타르벨라 발전소 공사를 수행했다.
동남아 사업의 거점은 싱가포르였다. 현대건설은 1981년 플라우테콩 매립공사와 창이공항 확장 매립공사에 이어 1986년 2월 1억3000만달러 규모 창이공항 제2터미널 공사를 수주해 1990년 8월 완공했다. 현지 업체 추안주와 합작해 1억3060만달러를 투자한 브라니섬 컨테이너터미널도 지었다. 1990년대에는 선텍시티 개발 공사와 창이공항 매립 2·3단계 공사를 수주했다. 동남아·남아시아는 중동에 이어 현대건설의 두 번째 주력 해외시장이 됐다.
정몽구 회장은 1996년 1월3일 서울 계동 사옥에서 열린 현대그룹 회장 취임식에서 '가치경영'을 경영 방침으로 내걸었다. 고객과 구성원의 가치를 높여 기업 가치를 키우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내용이다. 국내 건설시장 개방과 세계화 등 경영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방침이었다.
정 회장은 전문경영인 자율경영체제를 도입하고 국내 처음으로 사외이사제를 시행했다. 의사결정 구조도 간소화했다. 건설·자동차·중공업 등 기존 주력사업 외에 일관제철소 건설과 금융업 진출도 추진했다. 정 회장은 1997년 5월 한국경영학회가 주는 한국경영자대상을 받았다. 수상 당시 가치경영이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을 계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건설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까지는 실적을 유지했다. 싱가포르에서 1억7000만달러 규모 주롱섬 연륙교와 창이 매립공사 등을, 홍콩에서 2억7000만달러 규모 호쿤 지역 재개발사업 등을 수주했다. 국내에서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와 부산아시안게임과 한일월드컵 관련 공사를 따냈다. 1997년 해외 수주액은 39억5181만달러였고 영업이익은 약 4648억원으로 전년 4078억원보다 늘었다.
문제는 유동성이었다. 1997년 초 한보철강과 삼미그룹 부도로 금융권이 대출을 조였고 금리와 환율이 급등했다. 현대건설은 1997년 7월 1억달러 규모 알파인 전환사채(CB)를 발행했지만 연말 외환위기 이후 유동성 압박은 더 커졌다.
1998년 수주액은 국내 3조8401억원과 해외 13억2000만달러에 그쳤고 경상적자 1773억원을 냈다. 1999년에는 주택사업 확대와 이란 사우스파 가스전 등 해외 대형 공사 수주로 국내 5조1397억원과 해외 40억400만달러를 수주했다. 하지만 환율 하락으로 해외 매출이 줄어 경상적자 1681억원을 기록했다. 유상증자와 해외 CB 발행으로 부채비율은 534.8%에서 299.3%로 낮췄다.
2000년 매출액은 전년보다 11% 늘어난 6조3894억원이었다. 하지만 유동성 확보를 위한 고정자산 매각 손실과 미수채권 대손상각과 부실채권 충당금 설정 등으로 2조9800억원의 손실을 냈다. 자구계획으로 1조2838억원을 조달해 부채는 5조7000억원에서 약 4조4000억원으로 줄였다.
현대건설은 2000년 11월3일 정부의 2차 기업구조조정에서 특별관리대상으로 분류돼 퇴출 보류 판정을 받았다. 채권단은 2001년 3월 출자전환 1조4000억원과 유상증자 1조5000억원을 지원하는 경영정상화 방안을 가결했다. 현대건설은 6월까지 지분 정리와 출자전환을 마치고 8월1일 채권단 경영체제에 들어갔다.
채권단은 현대건설 창립 59주년인 2006년 5월25일 현대건설의 채권단 공동관리 종료를 발표했다. 현대건설도 경영 정상화로 공동관리 절차가 끝나 기업구조조정촉진법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공시했다. 2001년 3월 출자전환 결정과 함께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5년2개월 만이다. 당초 예정보다 6개월 빨랐다.
워크아웃 돌입 당시 현대건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2000년 한 해에만 네 차례 자구계획을 발표했다. 경영진 사재 출연과 자산 매각 등으로 1조2838억원을 마련했지만 자력 회생에는 실패했다. 그해 영업손실은 3826억원이었고 부채는 4조4000억원이었다.
현대건설은 구조조정과 감자를 거쳐 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첫해인 2002년 흑자로 전환했다. 주가도 회복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하락한 주가는 2002년 주당 2000원 아래로 떨어져 관리종목으로 지정됐다. 이후 실적이 개선되면서 2005년 4월12일 2만원대에 진입했다.
2005년 수주액은 8조745억원이었다. 국내에서 공공과 민간을 합쳐 5조2652억원을 수주했다. 해외에서는 6억9600만달러 규모 UAE 제벨알리 L발전소와 6억달러 규모 이란 올레핀 화학설비와 4억달러 규모 쿠웨이트 에탄 회수처리시설 등 26억6300만달러를 수주했다. 전년 대비 약 280% 늘어난 규모로 국내 건설사 해외 수주 총액의 25%였다. 매출액은 4조2851억원으로 약 7.8% 줄었지만 당기순이익은 3265억원으로 전년 673억원보다 크게 늘었다.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그룹은 2011년 4월1일 오전 8시 서울 계동 사옥 대강당에서 합동 월례조회를 열었다. 두 회사가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처음 함께한 자리다. 현대건설 편입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은 계열사 50개와 총자산 126조원과 국내외 임직원 18만4000명 규모가 됐다. 1947년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서 현대토건이 출발한 이후 따로 떨어졌던 자동차와 건설 사업이 다시 한 그룹에 묶였다.
2000년대 중후반 중동을 중심으로 국내 건설사 간 해외 수주 경쟁이 심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저가 수주가 늘었고 그 손실이 2010년대 초반부터 실적에 반영됐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11년 4월 현대건설 인수 직후 실사를 벌여 중동 일부 공사를 손실 우려 프로젝트로 분류했다. 이후 현대건설은 일정 수준의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공사는 수주전에서 빠졌다.
현대건설은 2013년 수주심사위원회 기능을 강화하고 전사 리스크관리위원회를 만들었다. 2015년 PRM(Project Risk Management)사업부를 신설했다. 2016년에는 전사 리스크 전담 조직인 PRM전략실을 만들었고 수주와 수행 단계를 연계한 통합 리스크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대건설은 2013년 해외 수주 누계 1000억달러를 넘었고 2016년 영업이익 1조원을 달성했다.
현대건설은 2013년 11월 해외 수주 누계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로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처음 해외에 진출한 지 47년 만이다. 그동안 55개국에서 781건을 수주했다. 2013년 말 누계액은 약 1012억달러로 같은 기간 국내 건설업계 해외 수주액의 약 17%를 차지했다. 지역별로는 중동(54%)과 아시아(32%)가 대부분이었고 공종별로는 플랜트(30%), 토목환경(25%), 전력(24%), 건축(21%) 순이었다.
1970년대에는 1976년 9억6000만달러 규모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등 중동 공사가 중심이었다. 1980년대에는 싱가포르 등 동남아로, 1990년대 후반에는 이란 사우스파 가스전 등 중동 플랜트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누계 수주액은 1982년 100억달러와 2006년 500억달러를 넘었다. 2011년 현대자동차그룹 편입 이후에는 아프리카와 중남미로 시장을 넓혔고 2012년부터 3년 연속 연간 해외 수주 100억달러를 넘었다.
현대건설은 2014년 2월3일 서울 계동 사옥 본관으로 복귀했다. 별관으로 옮긴 지 13년2개월 만이다. 현대건설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본관을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층별로 나눠 매각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00년 계열 분리 이후 계동 사옥 지분을 꾸준히 늘려왔다.
같은 시기 현대엔지니어링도 계동 사옥 별관으로 옮겼고 4월에는 현대엠코와 합병했다. 현대엠코는 2002년 설립된 그룹 건설사로 합병 당시 시공능력평가 13위였다. 이로써 현대자동차그룹 건설 부문은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스틸산업, 현대종합설계로 정비됐다.
(왼쪽부터) 홀텍 크리스 싱 CEO, 현대건설 윤영준 사장이 사업 협력 계약(Teaming Agreement) 서명하는 모습
소형모듈원전(SMR)은 전기출력 300MW 이하의 소형 원자로다. 원자로와 증기발생기와 가압기를 하나의 용기에 넣은 일체형 구조가 특징이다. 기존 대형 원전보다 부지 확보가 쉽고 안전성과 경제성에서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건설은 2021년 11월22일(현지시간) 미국 원전기업 홀텍인터내셔널과 SMR 공동 개발과 사업 공동 진출을 위한 사업협력계약(Teaming Agreement)을 맺었다. 계약식은 미국 뉴저지주 홀텍 사업장에서 윤영준 현대건설 사장과 크리스 싱 홀텍 최고경영자(CEO)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양사는 상업화 모델 공동 개발과 마케팅·입찰 공동 참여와 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현대건설은 홀텍 SMR 사업의 글로벌 설계·구매·시공 독점권을 확보했고 북미 시장 사업에도 지분을 갖고 참여한다.
계약 당시 홀텍의 SMR 모델은 160MW급 경수로형 SMR-160이었다. 캐나다 원자력안전위원회(CNSC)의 설계 예비 인허가 1단계를 통과했고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었다. 미국 에너지부의 차세대 원자로 실증 프로그램 모델로도 선정됐다.
현대건설은 이후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SMR 상용화 설계에 착수했다. 양사는 미국 미시간주 팰리세이즈 원전 부지에 첫 SMR 건설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에 이어 유럽 등 20개국 이상에 공동 진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시공 위주에서 벗어나 기술 개발과 영업과 구매와 시공과 시운전까지 건설 전 단계를 맡는 사업 구조로 바꿔간다는 계획이다.
홀텍은 미국 플로리다에 본사를 둔 원전기술 기업이다. 1980년대부터 원전 관련 기술을 개발해 왔고 사용후핵연료 저장 분야에 강점이 있다. 원전 해체 사업도 하고 있으며 오이스터크릭과 필그림과 인디언포인트 원전 해체를 맡았다.
'2025 현대건설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에너지 중심의 미래 성장 전략 ‘H-Road’를 발표하는 이한우 대표의 모습
현대건설은 2025년 3월28일 서울 여의도 페어몬트호텔에서 '2025 CEO 인베스터 데이'를 열고 중장기 성장전략 'H-로드(Road)'를 발표했다.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사업 확대가 핵심이다. 이한우 대표와 최영 뉴에너지사업부장과 김도형 재경본부장이 전략을 발표했고 이어 각 사업본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현대건설은 대형원전과 SMR을 중심으로 에너지 사업을 키울 계획이다. 수소 생산플랜트와 전력망 분야 사업도 늘리고 원전 연계 데이터센터 같은 패키지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에너지 생산부터 저장과 운송과 활용까지 아우르는 사업 구조를 갖추겠다는 구상이다.
현대건설은 수주 규모를 현재 17조5000억원에서 2030년 25조원으로 늘리고 에너지 분야 매출 비중을 21%까지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재무 목표로는 2030년까지 연결 기준 수주·매출 40조원과 영업이익률 8% 이상을 내놨다. 이를 위해 에너지 중심 성장과 포트폴리오 최적화와 수익성 기반 관리 체계 구축을 추진한다.
[1]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HYUNDAI)'라는 사명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2] 공채제도를 도입하기 전까지 현대건설의 인력충원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전근대적 방식에 의해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1958년 공채제도를 본격 도입한 후에도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건설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반적 인식은 정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하면서 급변했다. 건설업이 사회기반시설의 건설과 공업화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성장산업으로 떠오르자 지원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3] 1961년에 착공해 1964년까지 총 3년여에 걸쳐 완성된 마포아파트는 심각한 도시 주택난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6층 10개동, 총 612세대 규모로 건설된 대단위 공동주택단지로 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4] 힐스테이트는 '언덕' 또는 '고급 주거단지'를 뜻하는 'Hill'과 '높은 지위', '품격'을 뜻하는 'State'가 합성된 브랜드로 '품격과 자부심을 주는 주거공간'을 의미했다. 여기에 사명인 'Hyundai'의 머리글자 'H'와 연계해 현대건설 브랜드로서의 정통성과 현대적인 감각을 조화시켰다. 2006년 10월 11일 현대건설은 새로운 브랜드를 최초로 적용한 '서울숲 힐스테이트' 모델하우스를 개관했다.
[5] 엘리베이터 4기를 비롯해 냉난방시설과 자동제어설비를 갖춘 세종로 사옥은 신축 당시 서울에서 손꼽히는 최신식 고층 건물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관심도 대단해서 설계 단계부터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항상 현장부터 둘러보고 사무실에 출근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6] 우리나라가 에너지 자립의 시발점이 될 중차대한 사업인 고리1호기의 건설을 외국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국내 업계에 관련 기술 확보가 전혀 이뤄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 내 건설사들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하도급을 받아 단순 시공을 수행하는 형태로 고리1호기 건설에 참여했으며 현대건설을 포함한 단 3개사만이 참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7] 한빛원전 이전 명칭은 '영광'
[8] 태국 남단의 국경도시 파타니와 나라티왓 두 도시를 연결하는 건설공사다. 태국 건설성 도로국이 발주한 IBRD(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국제부흥개발은행) 차관공사로 1967년 1월에 착공해 1968년 3월 완공했다.
[9]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현대건설이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펼친 선전은 1980년대를 넘어 1990년대에 도 지속됐다. 1991년 선텍시티 개발 공사, 1993년과 1996년 싱가포르 창이 공항 매립 2단계와 3단계 등 을 잇달아 수주한 것이다. 이 같은 성과는 중동 시장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 주력 시장을 형성하며 해외 사업의 활로를 뚫어줬다.
[10] IMF 외환위기와 유동성 악화로 시름에 빠져 있던 2001년 3월21일 또 하나의 비보가 전해졌다. 창업자 정주영 명예회장의 영면 소식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맨주먹으로 현대 신화를 창조한 거인의 타계는 현대건설과 그룹을 넘어 전 국민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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