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THECFO가 제공하는 ‘아카이브(Archive)’는 시장에서 벌어진 이슈의 발단과 결말을 기록한다. 기업의 현재를 만든 이정표적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됐을까. 사건의 방향성을 흔들어 놓은 주요 이벤트는 뭘까. 기사 한 건이 하나의 조각이라면 아카이브는 조각이 맞춰진 퍼즐이다. 거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관계를 아카이브가 담았다.
한미약품은 1973년 약사 고(故) 임성기 회장이 서울 동대문구의 작은 약국에서 일군 꿈을 제약회사로 옮겨놓으면서 탄생했다. 복제약을 판매해 생존 기반을 마련해야 했던 시절부터 개량신약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독자 플랫폼 기술 ‘랩스커버리(LAPSCOVERY)’를 앞세워 글로벌 빅파마와 대형 기술이전 계약을 연달아 체결하기까지 한미약품의 역사는 한국 제약산업이 제네릭 중심 산업에서 R&D 중심 산업으로 탈바꿈한 과정과 겹친다.
한미약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한국형 R&D 전략’이다. 제네릭에서 창출한 수익을 개량·복합신약 개발에 투입하고 여기서 확보한 역량을 다시 혁신신약 연구에 투자하는 단계적 선순환 구조다. 임 회장은 장기간 연구개발 투자를 이어가며 한미약품을 국내 영업 중심의 제약사에서 글로벌 신약개발 기업으로 바꿔놓았다.
그 결과가 2015년 연이어 체결한 대형 기술이전 계약이었다. 한미약품은 사노피·얀센·일라이 릴리·베링거인겔하임 등 글로벌 제약사에 항암·면역질환·당뇨·비만 분야 후보물질을 이전했다. 국내에서 발굴한 신약후보와 플랫폼 기술도 글로벌 제약사의 핵심 개발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시장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영광 뒤에는 그림자가 따랐다. 계약 해지와 권리 반환, 임상 중단, 임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와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분쟁까지 이어졌다. 한미약품의 역사는 성공 신화인 동시에 하나의 신약이 실제 제품으로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시간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문서는 임성기약국 시절부터 2015년 기술이전 신화, 반환 파이프라인의 재기와 이후의 오너 경영권 분쟁까지 한미약품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정리한다.
임 회장은 1973년 6월 15일 대동약품이 보유한 5종의 의약품 허가를 인수해 임성기제약회사를 설립했다. 사명은 한미약품공업주식회사로 변경됐다.
창업 초기 한미약품은 자본과 영업망에서 기존 대형 제약사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정면 승부 대신 좌제·연질캡슐·발포정·시럽 등 당시 국내에서 흔하지 않았던 제형으로 차별화했다. 신물질을 개발할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존 성분을 더 안정적이고 편리하게 전달하는 기술을 축적했다.
故 임성기 한미약품그룹 창업주 회장이 임성기 약국 시절 흰 가운과 명찰을 패용하고 손님을 맞고 있다. (출처: 한미약품 홈페이지)
한미약품은 1979년 연질캡슐 자동충진기를 도입해 수탁생산에 나섰다. 1984년에는 원료의약품 계열사 한미정밀화학을 설립했다. 완제의약품을 생산하는 한미약품과 원료 합성기술을 담당하는 한미정밀화학을 함께 육성하면서 연구 결과를 실제 제품으로 구현할 기반을 마련했다.
1988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창업 15년 만에 제조·연구·자본조달 기반을 갖춘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한미약품은 아모디핀의 성공을 복합신약으로 확장했다. 2009년 출시한 ‘아모잘탄’은 암로디핀과 로사르탄을 한 알에 담은 고혈압 복합제다. 서로 다른 작용기전의 성분을 결합해 혈압조절 효과와 복약 편의성을 높였다.
아모잘탄은 미국 머크를 통해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이뇨제와 이상지질혈증 성분을 추가한 아모잘탄플러스·아모잘탄큐·아모잘탄엑스큐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했다. 하나의 성공 제품을 여러 조합으로 확장해 장기간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이었다.
아모잘탄정. (출처: 한미약품 홈페이지)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에소메졸’은 2013년 국내 개량신약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았다. 자체 제형과 생산자료가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의 허가 기준을 통과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2015년 출시한 이상지질혈증 치료제 ‘로수젯’은 로수바스타틴과 에제티미브를 결합한 복합신약이다. 로수젯은 한미약품의 최대 처방품목으로 성장했다. 아모잘탄·에소메졸·로수젯 등 자체개발 제품은 일회성 기술료와 달리 매년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만들며 혁신신약 연구를 뒷받침했다.
권리가 반환됐다고 후보물질의 수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미약품은 되돌아온 파이프라인의 임상자료와 작용기전을 다시 분석해 적응증을 바꾸거나 새로운 파트너를 찾았다.
얀센에서 반환된 후보물질은 ‘에피노페그듀타이드’라는 이름으로 2020년 MSD에 다시 기술이전됐다. 비만·당뇨병에서 대사이상 지방간염(MASH) 치료제로 개발 방향을 바꿨다. 2026년 3월 말 기준 글로벌 임상 2상 단계로 2025년 12월 임상 2b상 환자 투약을 마쳤다.
출처: 한미약품 사업보고서 등
일라이 릴리에서 돌아온 포셀티닙은 류마티스관절염 대신 혈액암 치료제로 방향을 전환했다. 노보메디슨이 원발성 중추신경계 림프종 국내 임상 2상과 비호지킨림프종 국내 임상 1b상을 진행하고 있다.
사노피에서 반환된 에페글레나타이드는 국내 비만치료제로 재탄생했다. 한미약품은 국내 임상 3상을 마치고 2025년 12월 품목허가를 신청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신속심사 대상으로 지정돼 2026년 하반기 출시를 목표로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당뇨 적응증으로도 국내 임상 3상에 진입했다.
기술이전 계약의 종료를 연구의 실패로 단정하지 않고 이미 확보한 물질과 임상자료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반환이 끝이 아니라 다음 개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한미약품이 직접 보여줬다.
2026년 3월 말 소네페글루타이드는 단장증후군 환자를 대상으로 글로벌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장 점막의 성장과 영양분 흡수를 돕는 GLP-2에 랩스커버리를 적용해 투여주기를 늘린 후보물질이다.
현재 허가된 GLP-2 계열 치료제는 매일 투여해야 한다. 한미약품은 소네페글루타이드의 반감기를 늘려 월 1회 투여하는 치료제로 개발하고 있다.
한미약품은 2026년 6월 일라이 릴리에 소네페글루타이드의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개발·제조·상업화 권리를 이전했다. 계약 규모는 최대 12억6000만달러이며 반환 의무가 없는 계약금은 7500만달러다. 개발·허가·상업화 성과에 따라 마일스톤과 판매 로열티를 추가로 받는 구조다.
릴리는 2015년 HM71224를 도입했다가 2019년 권리를 반환한 파트너다. 첫 계약이 종료된 뒤에도 양사는 연구개발 관계를 이어갔고 새로운 랩스커버리 후보물질로 다시 손을 잡았다.
랩스커버리는 대형 기술수출을 이끈 뒤 여러 차례 권리 반환을 겪었다. 롤베돈은 미국에서 상업화됐고 소네페글루타이드는 다시 대형 계약을 이끌었다. 장기간 개발한 플랫폼이 후속 파이프라인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재확인한 거래였다.
임 회장의 별세는 대규모 상속세와 승계 문제를 남겼다.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배우자 송영숙 회장과 자녀 임종윤·임주현·임종훈에게 나눠 상속됐다.
가족들은 연부연납과 주식담보대출 등을 활용해 상속세 재원을 마련했지만 장기간 현금을 조달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지분이 가족 구성원에게 분산되면서 누구도 단독으로 안정적인 지배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임 회장이라는 구심점 아래 가려졌던 가족별 경영구상과 이해관계도 수면 위로 올라왔다.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한 지분 매각이나 외부투자자 유치는 그룹 지배권 변화로 직결될 수 있었다. 이 구조적 문제가 2024년 OCI그룹과의 통합 추진을 계기로 공개적인 경영권 분쟁으로 폭발했다.
경영권을 확보한 뒤에는 4자연합 내부에서 갈등이 나타났다. 전문경영인 체제의 운영 방식과 신사업 의사결정, 신동국 회장의 경영 참여 범위를 둘러싸고 신 회장과 모녀·라데팡스의 관계가 틀어졌다. 공동의사결정 절차 위반 여부를 둘러싼 소송도 이어졌다.
신 회장은 2026년 들어 임종윤 회장과 가족 측 지분을 잇달아 인수했다. 3월 임종윤 회장 측 지분을 확보한 데 이어 7월에는 배우자와 친인척 7명이 보유한 지분 5.3%를 추가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출처: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임종훈 사장은 2026년 7월 보유 지분 가운데 2.50%를 나우아이비22호펀드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모친 송영숙 회장과 누나 임주현 부회장과 함께 임 회장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펀드의 출자자 구성과 의결권 행사 약정은 공개되지 않았다.
2026년 7월 현재 한미약품그룹의 분쟁은 모녀와 형제의 직접 대결에서 신동국 회장과 모녀·라데팡스 사이의 관계로 성격이 달라졌다. 4자연합의 주주간 계약은 유지되고 있고 임종훈 사장도 모녀와 공동전선을 선언했다. 지배구조가 이전보다 안정됐지만 대주주 사이의 이해관계까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경영권 분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한미약품의 연구조직은 임상을 진행했다. 2026년 3월 말 기준 비만·대사 분야에서는 에페글레나타이드가 국내 허가 단계에 진입했고 HM15275가 미국에서 비만과 제2형 당뇨병 임상 2상을 진행하고 있다. 근육 증가를 겨냥한 비만치료제 HM17321은 미국 임상 1상 단계다.
MASH 분야에서는 MSD가 에피노페그듀타이드 임상 2b상을 맡고 있다. 한미약품이 자체 개발하는 삼중작용제 에포시페그트루타이드도 글로벌 임상 2상 단계다.
희귀질환에서는 소네페글루타이드가 단장증후군 글로벌 임상 2상을 진행하던 중 릴리에 기술이전됐다. 선천성 고인슐린혈증 치료제 에페거글루카곤은 글로벌 임상 2상 단계로 미국 FDA의 혁신치료제 지정을 받았다.
항암 분야에서는 벨바라페닙·포셀티닙·투스페티닙·HM97662·HM16390 등 합성신약과 면역항암 후보물질의 임상이 이어지고 있다. 한미약품의 연구개발은 랩스커버리 기반 대사·희귀질환 파이프라인과 합성 항암신약을 두 축으로 확장됐다.
2015년 한미약품의 연이은 대형 기술이전은 한 회사의 성과에 그치지 않았다. 국내 제약사가 자체 발굴한 후보물질과 플랫폼 기술도 글로벌 제약사의 개발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켰다. 완제품 수출과 제네릭 판매에 머물던 국내 제약산업의 성장 경로가 기술수출과 글로벌 공동개발로 확장된 계기였다.
이후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은 연구 초기부터 글로벌 기술이전을 염두에 두고 파이프라인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임상 초기 단계에서 글로벌 파트너를 확보해 개발비와 위험을 나누는 방식이 하나의 성장모델로 자리 잡았다.
한미약품이 후발 기업들의 성과를 직접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한미약품은 글로벌 제약사가 한국에서 발굴한 신약과 플랫폼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할 수 있다는 선례와 평가 기준을 만들었다. 제약사에서 시작된 기술이전 시장은 이후 바이오텍으로 확산됐다.
알테오젠·리가켐바이오·유한양행·에이비엘바이오 등은 플랫폼 기술과 신약 후보물질을 앞세워 글로벌 제약사와 대형 계약을 체결하며 시장을 넓혔다. 한미약품이 먼저 열어젖힌 기술이전 중심의 성장 경로를 각 기업이 서로 다른 기술로 확장한 셈이다.
2015년 이후 10년 동안 국내 제약·바이오 기술이전 시장은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
모든 계약이 최종 허가와 판매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한미약품도 계약 반환과 임상 중단을 겪으며 계약 총액과 실제 수익 사이의 차이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국내 제약사가 글로벌 기업과 신약 기술을 거래하고 공동개발하는 시장을 본격적으로 열었다는 점은 한미약품이 산업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한미약품에 남은 첫 번째 숙제는 지배구조의 안정이다. 오너 일가의 직접적인 대결은 잦아들었지만 대주주 사이의 주주간 계약과 소송, 지분 이해관계는 모두 정리되지 않았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장기 전략과 연구개발 투자를 흔들림 없이 이어가려면 대주주 관계가 경영 현장의 불확실성으로 번지는 일을 막아야 한다.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상업화도 중요한 분기점이다. 한미약품은 사노피에서 반환된 후보물질의 국내 임상 3상을 직접 마치고 비만치료제로 허가를 신청했다. 기술이전과 계약금 수령을 넘어 자체 개발한 신약을 직접 허가받아 생산·판매하는 역량을 입증할 시험대다.
에페글레나타이드가 시장에 안착하면 반환된 파이프라인을 되살린 사례이자 한미약품의 한국형 R&D가 자체 상업화로 이어지는 결과가 된다. 소네페글루타이드와 에피노페그듀타이드 등 글로벌 파트너가 개발하는 후보물질의 임상 진전도 함께 증명해야 한다.
임 회장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전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등반가들이 모인 베이스캠프 사진을 좋아했다. 한미약품은 국내 제약산업이 세계시장으로 향하는 길을 먼저 열었지만 자체 상업화 신약과 안정된 지배구조라는 마지막 구간을 남겨두고 있다.
임 회장이 만든 한국형 R&D 모델이 개인의 결단에 머물지 않고 다음 세대에도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남을지, 대주주 갈등을 넘어 연구개발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다시 결집할 수 있을지가 한미약품의 다음 역사를 결정한다.
[1] 한미약품은 한국형 R&D를 장기간 축적한 제제기술로 개량·복합신약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역량을 글로벌 혁신신약 개발에 재투자하는 구조로 정의한다.
[2] 일부 과거 자료는 개국 시기를 1967년으로 기록하지만 한미약품과 임성기재단은 1966년 휘경동 개국을 창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3] 현재의 한미약품 법인은 2010년 옛 한미약품의 의약품 사업부문이 인적분할돼 신설됐다. 분할 뒤 존속법인은 한미홀딩스를 거쳐 한미사이언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4] 한미약품이 공식 자료에서 밝힌 계약 규모는 600만달러다.
[5] 마이크로에멀전은 물에 잘 녹지 않는 약물을 미세한 입자로 분산해 체내 흡수율과 생체이용률을 높이는 제제기술이다.
[6] 북경한미약품은 1996년 3월 설립됐다. 2026년 3월 말 기준 한미약품의 지분율은 73.68%다.
[7] 개량신약은 기존 의약품의 유효성분을 토대로 염·제형·투여경로·함량·성분 조합 등을 개선한 의약품이다. 신물질 신약보다 개발 위험이 낮고 단순 제네릭보다 기술 장벽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