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한화손해보험과 현대해상의 보험계약마진(CSM) 성과는 얼마나 효율적으로 쌓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키느냐에서 갈렸다. 현대해상은 신계약 CSM 배수 측면에서 우위를 보였지만 변동성은 컸다. 한화손보는 상대적으로 연말 감소 폭을 줄이는 식으로 안정적인 적립 흐름을 이어갔다.
같은 장기보험을 팔아도 기대이익을 만드는 방식은 달랐다. 현대해상은 관리CSM과 고수익 상품 중심 포트폴리오를 앞세워 배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반면 한화손보는 신담보 손해율을 보수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변동 요인을 흡수할 여지를 넓혔다.
◇질적 우위 현대, 증가 속도 한화 현대해상의 강점은 신계약 CSM의 효율에서 두드러졌다. 현대해상은 고수익 상품 비중이 높은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지난해 CSM 배수를 16배 수준을 구현했다. 한화손보는 전년 대비 배수를 1.2배 올렸지만 11배 안팎을 기록했다. CSM 배수가 높을수록 수익성이 큰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는 의미다.
현대해상의 CSM 배수는 업계 최상위권이다. 신회계제도(IFRS17) 체제에 맞춰 CSM 관리를 위한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내부 자체 지표인 관리CSM으로 특별 관리를 한 덕분이다. 현대해상은 꾸준히 CSM에 특화한 상품과 담보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정비하고 있다. 장기보험 영업에서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조직 운영 방식을 바꿔온 셈이다.
지난해 현대해상의 신계약 CSM은 2조원을 넘어섰다. 한화손보 1조291억원을 두 배가량 앞질렀다. 현대해상과 한화손보의 CSM 잔액도 지난해 말 기준 각각 8조9020억원, 4조694억원으로 두 배 넘게 차이를 보였다. 물량 측면에서 두 곳의 격차가 꽤 큰 상황이다.
신계약 CSM의 증가율은 한화손보가 더 가팔랐다. 한화손보는 2024년 7410억원에서 지난해 38.9%를 늘렸고 현대해상은 1조8210억원에서 14.7%를 확대했다. 절대 규모 면에선 차이가 크지만 성장세만 놓고 보면 한화손보의 확대 속도도 만만치 않은 모습이다.
한화손보가 강점을 보인 또 다른 측면은 CSM 축적 흐름이다. 현대해상은 CSM 잔액이 2023년 말 9조원을 넘겼지만 2024년 말과 2025년 말에는 9조원 밑으로 떨어졌다. 반면 한화손보는 2023년 말과 2024년 말 CSM이 4조원을 밑돌았지만 지난해 말 4조694억원을 기록해 안정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연말 조정에서 갈린 축적 안정성 두 곳의 CSM 축적 흐름 차이는 연말 계리가정 변경 국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현대해상은 2024년과 2025년 모두 4분기 CSM 감소율이 한화손보보다 컸다. 현대해상은 2024년 4분기 한 분기에만 CSM이 11.5%나 줄었다. 이 기간 한화손보의 CSM 감소율은 3.4%에 불과했다. 현대해상과 한화손보의 지난해 4분기 감소율도 7.5%, 4.5%를 기록해 차이가 뚜렷했다.
이는 실손보험에 대한 집중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실손보험은 손해율 변동에 민감한 상품군이라 의료 이용량과 제도 변화에 따라 예실차가 크게 벌어질 수 있다. 이런 부담은 연말 계리가정 변경 과정에서 CSM 조정 폭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난해 현대해상과 한화손보의 장기보험 내 실손의료 비중은 월납 계속보험료 건수 기준 각각 18%, 9%로 두 배 차이 난다. 현대해상의 실손 노출도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현대해상이 지난해 4분기 당기순이익이 적자로 전환한 것도 실손 손해율 악화에 따른 손실부담계약 비용 증가가 결정타로 작용했다.
한화손보의 보수적인 계리가정 운용도 빛을 발했다. 한화손보는 신담보 개발 단계에서 금융당국 가이드라인보다 최소 10%포인트 이상 보수적인 손해율 가정을 적용하고 있다. 실제 손해율이 이런 보수적 가정보다 낮게 형성되면 변동 요인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상쇄할 여지가 생긴다. 한화손보가 공격적으로 CSM을 쌓기보다 덜 흔들리게 관리하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