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의 고질적인 저평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장기간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기업의 명단을 공개하며 기업가치 개선을 유도하고 나섰다. 저평가 배경에는 낮은 자본효율성과 성장 정체, 소극적인 주주환원, 지배구조에 대한 불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더벨은 산업계 전반의 저PBR 원인을 분석하고 주요 기업의 대응 전략과 시장의 재평가 가능성을 짚어본다.
한국거래소가 처음 공표한 저PBR 기업 151개사 가운데 제약바이오·헬스케어 업종은 18개사로 나타났다. 이 중 10개사가 제약사 또는 제약 지주사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는 국내 제약바이오업계 저평가 실태의 일부에 불과하다. 공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기업가치가 순자산을 밑도는 상장사가 적지 않다.
저평가의 원인은 기업마다 다르다. 제약사는 제네릭 중심 사업구조와 경쟁 심화, 약가 인하 압력 등으로 수익성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주사는 자회사 가치에 대한 할인과 제한적인 주주환원이, 바이오기업은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 대비 더딘 성과 창출이 부담으로 작용한다.
◇저PBR 명단 절반 이상 제약사…수익성 악화에 기업가치 할인
한국거래소는 11월 2일 저PBR 기업 151곳을 처음 선정해 공표했다. 최근 6개 반기 연속 또는 최근 7개 반기 중 6개 반기 동안 시장·업종별 PBR 하위권에 머문 기업이 대상이다. 기업가치 제고계획을 제출한 일부 기업은 공표 대상에서 제외됐다.
제약바이오헬스케어 업종에서는 코스피 8곳과 코스닥 10곳 등 18곳이 포함됐다. 전체 공표 기업의 11.9%다. 광동제약과 동화약품, 한독, 환인제약 등 제약사 8곳과 종근당홀딩스, 제일파마홀딩스 등 제약 지주사 2곳이 이름을 올렸다. 18곳 가운데 10곳으로 55.6%에 해당한다.
이들 기업은 오랜 사업 기반과 축적된 자산에도 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종근당홀딩스의 PBR은 0.28배, 동화약품은 0.37배에 머물렀다. 한독과 환인제약도 각각 0.45배, 0.44배로 순자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약사들의 저평가 배경에는 수익성 악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독은 2022년 285억원이던 연결 영업이익이 지난해 33억원으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률은 5.2%에서 0.6%로 4.6%포인트 하락했다. 동화약품도 2022년 299억원이던 영업이익이 지난해 3억원 수준에 그쳤다.
제네릭 중심 사업구조와 경쟁 심화, 약가 인하 압력 등으로 기존 사업의 수익성이 정체된 데다 신규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도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 장기간 축적한 자본을 충분한 이익으로 연결하지 못하면서 기업가치가 할인받는 구조다.
제약산업을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도 저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오랜 업력과 안정적인 매출 기반은 강점이지만 성장성이 제한된 성숙 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정부의 약가 규제로 가격 결정권이 제한된 데다 제네릭 중심의 경쟁구조에서는 외형 확대가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신약 개발과 해외시장 진출 등 사업구조 전환에도 상당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하다.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가 약해지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이는 다시 낮은 기업가치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실적이 개선돼도 저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종근당홀딩스는 지난해 연결 영업이익이 583억원으로 2023년 170억원 대비 3배 이상 증가했지만 PBR은 0.28배에 머물렀다. 지주사 특유의 자회사 가치 할인과 자본 배분 정책 등도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거래소 공표 명단이 저PBR 제약바이오기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제도는 업종별 상대평가와 저평가 지속기간 등을 기준으로 선정한 만큼 PBR이 1배 미만이더라도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기업이 존재한다. 저평가 원인 역시 기업별 사업구조와 재무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자본효율·주주환원 개선 과제…바이오기업은 투자 회수 관건
저PBR 해소의 핵심은 축적된 자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에 있다. 기업의 자산 규모가 커지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자기자본이익률(ROE) 개선과 투자자산의 수익성 점검이 필요하다.
주주환원 정책도 재평가의 변수다. 환인제약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주당 배당금을 300원으로 유지했다. 지난해 배당성향은 40.8%까지 상승했지만 순이익 감소에 따른 결과로 배당금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현금창출력을 확보한 기업일수록 투자와 주주환원 사이에서 명확한 자본 배분 원칙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챗GPT로 만든 이미지
기업들의 대응도 시작됐다. 제일파마홀딩스는 기업가치 제고계획을 통해 2028년까지 PBR 0.5배, ROE 6%, 배당성향 2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한국거래소도 저PBR 공표 기업을 대상으로 내년부터 맞춤형 개선 컨설팅을 지원할 예정이다.
바이오기업은 저평가의 원인이 다르다. 연구개발 성과의 불확실성과 장기간의 투자 회수 기간이 기업가치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특히 대규모 생산시설을 구축한 기업은 자산 증가가 실제 매출과 이익 확대로 이어지는지 입증해야 한다.
에이프로젠바이오로직스와 앱토크롬의 PBR은 각각 0.16배, 0.07배로 제약사보다도 낮았다. 저평가가 장기화되면 자금조달 여건도 악화될 수 있다. 낮은 주가에서 유상증자나 전환사채(CB) 발행에 나서면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 부담이 커지고 투자 여력도 제약받을 수 있다.
결국 제약바이오업계의 밸류업은 일률적인 주가 부양책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제약사는 본업의 수익성 회복과 자본효율 개선, 지주사는 자회사 가치 반영과 주주환원 확대가 과제다.
바이오기업은 연구개발 성과의 사업화와 투자금 회수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기업별 저평가 원인을 해소할 실질적인 경영 전략이 시장의 재평가를 가를 전망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기업가치 제고가 중요한 경영 과제로 부상하면서 자사에서도 내부 대응 TF를 신설했고 업계에서도 각자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며 "저PBR 기업 공표에 따른 제도 변화와 후속 조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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