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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뷰티 '칼라파고스' 탈출 성공기

최은수 서치앤리서치(SR)본부 차장  2025-07-31 08:25:59
"국내 뷰티 브랜드만 1만 곳이 넘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생존 자체가 결코 쉽지 않아요. 대신 우리는 한국이란 테스트베드에서 검증받았기 때문에 어딜 나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경쟁력을 인정받고 살아남아 해외로 나가니 확실히 느껴집니다. 현지 기업들은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는 게요."

신재하 에이피알 CFO는 자사 브랜드 메디큐브의 성공을 '양궁'에 곧잘 비유한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은 파벌·지연·학연 등 외부 변수를 차단하고 오로지 실력만으로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리다. 국가대표를 놓고 겨루는 선수마다 실력이 워낙 출중해 일단 대표로 선발만 되면 세계랭킹 1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따 놓은 당상으로 본다.

한국 뷰티 산업이 양궁과 닮은 이유는 국내에서 살아남는 게 곧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길이기 때문이다. 내수만으론 자생을 기대하기 어려운 좁은 시장에 경쟁력 있는 브랜드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척박한 국내 영업 환경을 버틴 기업들은 제품력·기획력·마케팅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에이피알 같은 K뷰티가 해외를 석권하는 사례는 갈라파고스 효과의 한국버전, '칼라파고스' 효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통상 갈라파고스 효과는 세계 시장 변화를 거부하고 자기 양식만 고집하다가 고립·도태되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특수한 시장 환경에서 고유 방식으로 성장한 기업들은 오히려 글로벌 무대에서 더 강점을 보일 때가 있다.

K뷰티의 한 축을 담당하는 보툴리눔톡신도 좋은 예다. 보톡스 원조로 불리는 애브비는 60억 달러(한화 약 8조3000억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과 전 세계에서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갖고 있었다.

물론 미국에도 입센의 디스포트, 멀츠의 제오민, 레반스의 댁시파이 등 보톡스 경쟁 제품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보톡스를 누를 만한 마케팅 전략이 부재했다. 앞서 '원조'를 강조하는 브랜드마케팅 하나만으로 시장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칼라파고스를 벗어난 대웅제약과 휴젤이 후발주자로 진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은 3000억원 규모의 국내시장을 두고 약 20곳의 기업과 경쟁을 버텨낸 비결을 미국에 풀기 시작했다. 보톡스보다 저렴하며 시술감도 같아 접목·대체도 쉽다는 점을 현지에 강조해 왔다. 대웅제약은 아예 해외 톡신 사업에만 드라이브를 걸었다.

휴젤은 미국 시장에 진출할 즈음 K뷰티가 글로벌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점도 활용했다. 톡신 외에 화장품까지 토털 에스테틱 라인업을 꾸리는 마케팅 전략을 꾸렸다. 대세인 치료시장이 아닌 미용시장을 겨냥한 확장전략이었다.

벌목에 속하는 곤충 최강자이자 토종 말벌인 장수말벌은 우연히 콘테이너에 실려 바다를 건넜고 미국 현지에 자리잡았다. 이후 어른 손바닥만 하게 자란 개체가 나타나 학계에 보고가 됐다. 국내에서도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를 자랑했는데 이조차 먹이가 충분치 못해 원하는 만큼 채 자라지 못했던 거였다.

규격 외 포식자인 장수말벌의 등장에 미국 현지 꿀벌들은 죽을 맛일 테다. 그러나 K뷰티의 약진으로 이를 향유하는 소비자들에겐 긍정적인 부가가치를 전하고 있다. K뷰티와 장수말벌의 탈출 혹은 수출 성공기는 '칼라파고스' 안에서 고민하는 많은 기업이 곱씹을 명료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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