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 가족, 세 개의 시대펼쳐보기 접기
"어린 날의 순박한 자연은 어느새 멀리 뇌리에서 사라져버리고 고향을 등진 도시의 流浪民(유랑민)처럼 거북한 긴장 속에서만 살아왔던 일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세월이 제2의 天性(천성)으로 화하여 다년간의 생활감정도 이런 습관에 이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개별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아산 정주영, '새 봄을 기다리며'
한 가문이 걸어온 궤적이 곧 한 나라의 산업 연보와 포개질 수 있을까. 현대차그룹의 정씨 가문, 정주영-정몽구-정의선 회장의 3대 경영은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과 겹쳐 나아간다.
강원도 통천군에서 서울로 도망와 품앗이 일꾼을 하던 청년이 자동차 수리공장을 경영하고 건설회사를 설립한 해가 1950년, 1915년생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30대 중반일 때다. 그가 한 1980년대 한 일간지에 기고한 '새 봄을 기다리며'를 보면 농사꾼의 아들에서 사업가로 변모하기까지 내면에 불었던 풍파가 읽힌다.
국산 자동차의 시대를 연 아버지가 있다면 그의 뒤를 따른 아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국산 자동차를 글로벌 시장에 안착시킨다. 공장과 품질에 천착한 끝에 비웃음을 사던 브랜드를 세계 3위권 완성차 그룹으로 키울 가교를 만든다. 손자 세대인 정의선 회장 시대에는 전동화·소프트웨어·로봇·UAM 등 자동차를 이동수단이 아닌 플랫폼으로 진화시킨다.
현대차그룹 3대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도 겹친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우리나라 지도를 바꿨고 울산에 세운 거대 공장은 어촌을 산업도시로 바꾸는 촉매가 됐다. 포니는 단순한 제품이 아닌 '우리 이름을 단 차'의 첫 기억을 고객에게 심어준다. 미국과 유럽에서 값싼 차로 불리던 현대와 기아의 자동차는 품질과 디자인으로 평가받는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했다.
정주영 창업주가 구축한 '현대'라는 우산 아래 자동차와 건설, 정유, 금융, 조선과 해운이 함께 움텄다. 시간이 흐르며 형제들이 맡은 축이 갈라져 나가 오늘날에는 현대차그룹과 HD현대, 현대백화점그룹, 현대해상, 현대그룹 등 여러 이름으로 흩어진 범현대가를 구축하고 있다.
정주영 창업주로부터 손자까지 장자승계가 이뤄진 현대차그룹은 이 여러 갈래 중에서도 자동차와 철강, 부품을 중심으로 한 축을 구축했다. 계열 분리와 재편의 역사는 별도의 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이 문서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을 기준으로 삼아 오너 3대의 리더십이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집중한다.
1.2. 삼 세대의 키워드 '개척·내실·전환'펼쳐보기 접기
세대가 바뀔 때마다 리더십도 달랐다. 맨땅에서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창업주는 개척자였다. 남들이 무모하다고 만류했던 고속도로 건설에 도전하고 조선소 건립 비용을 빌려오는 한편 중동의 공사를 따냈다. 외국 기술과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직접 고장난 차를 고치는 실무자의 면모를 보였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내실을 다진 인물이다. 2025년 창간 100주년을 맞은 저명한 자동차 매체 '미국 오토모티브 뉴스'는 현대차그룹 삼대 회장을 100주년 기념상의 수상자로 발표했다. 오토모티브 뉴스는 정몽구 명예회장을 두고 품질 경영을 현대차그룹에 안착시킨 인물로 평가했다.
손자 정의선 회장이 전면에 나서며 무게중심은 다시 이동한다. 그는 자동차를 더 이상 이동수단으로만 보지 않았다. 자동차를 무한히 변주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인식하면서 전기차와 소프트웨어, 자율주행, 수소와 로봇,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 다채로운 산업군을 하나의 생태계로 엮고 있다. 전환의 리더십이다.
2.2. 불탄 정비소에 "철거비 아꼈다" 배짱 두둑했던 사장펼쳐보기 접기
쌀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주영 창업주는 아버지께 논 2000평을 사드린다. 1940년 봄 서울로 다시 돌아왔는데 쌀가게 단골손님과 인연이 닿는다. 자동차 기술자였던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인 '아도서비스'의 인수를 권한다.
한달도 채 되지않아 공장에 불이 난다. 수리 중이던 트럭 다섯 대와 올스모빌 승용차까지 모두 탄다. 이때 정주영 창업주의 담대한 면모가 빛을 발한다. 불탄 정비소를 보고는 "철거비를 아꼈다"며 털어버렸고 돈을 빌려준 이들에게 돈을 갚을 테니 밑천을 마련하게 돈을 더 꾸어달라는 배짱도 부린다.
평소 신용이 두터웠던 그는 동대문에서 다시 자동차 수리공장을 연다. 그는 기술자이기도 했지만 사업자의 눈으로 시장을 볼 줄 알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고치는 서비스가 매출로 이어진다는 판단 아래 공정을 표준화하고 부품 재고를 관리했다. 1943년 일본의 기업정리령으로 합병당했지만 이 시기를 거치며 정주영 창업주는 자동차의 모든 기능을 완전히 익히게 된다.
해방 후 그는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우고 1950년 둘을 합쳐 현대건설로 키운다. 이 건설사가 훗날 현대그룹의 모체가 되고 자동차·조선·중공업·무역으로 뻗어가는 씨앗이 된다.
2.3. 포니 '우리 이름을 단 차'의 탄생펼쳐보기 접기
"포니가 완성되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져라".
정주영 창업주가 포니 개발 계획을 밝히자 당시 GM의 한국 대표가 한 말이다. 1960~70년대, 국내 자동차 기업들은 해외 기업의 제품을 조립하는 수준에 그쳤다.
정주영 창업주는 국산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에 승부를 건다. 우리 자동차 산업이 해외 선진업체의 하청기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였다. GM의 한국 대표처럼 많은 이들이 이 계획을 비웃었다. 설계 경험도 자본도 부족한 국내 회사가 자체 모델을 개발해 수출까지 하겠다는 건 무모해보였다.
정주영 창업주는 일본 미쓰비시에서 엔진과 기술을 들여오고 1970년대 전설적인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uigaro)에게 차체 디자인을 맡긴다.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 소형차 포니가 등장하고, 이듬해 울산에 완성차 공장이 완공된다. 1975년부터 양산된 포니는 첫해에만 1만대 이상 팔리며 국내 승용차 시장의 40% 안팎을 차지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자체 모델 승용차 보유국이 됐다.
포니를 위해 세운 울산 공장은 조립 공장을 넘어 수출 전용 부두까지 갖춘 단지였다. 이후 울산 공장은 연간 100만대 이상을 생산·선적하는 세계 최대 규모 자동차 단지 가운데 하나로 성장한다. 정주영 창업주의 모험이 포니로 대표되는 국산 자동차의 성공시대를 연 셈이다. 이후 엑셀·쏘나타·그랜저로 이어지는 승용차 라인업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3. 정몽구: '품질경영' DNA 심은 자동차 왕국펼쳐보기 접기
"품질은 우리의 자존심이자 기업의 존재 이유다."
"생산과 품질 향상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
3.2. IMF 위기와 기아 인수펼쳐보기 접기
1997년 외환위기로 기아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포드를 포함한 외국 회사들이 인수 후보로 거론된다. 결국 기아를 품은 것은 현대그룹이었다.
1998년 말 현대는 기아·아시아자동차 인수 우선협상대상자가 됐다. 지분 51%를 약 1조원대에 취득하는 구조를 짠다. 채권단은 7조원대 채무를 정리하고 현대는 기아를 사들인다. IMF 국면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내 완성차 구조조정'에 성공한 사례로 꼽히는 동시에 그룹 안에서는 큰 결단이었다. 완성차를 하나 더 떠안는다는 것은 생산라인·부품사·노조·딜러망까지 중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3.3. 왕자의 난펼쳐보기 접기
정몽구 명예회장은 차남이었지만 형 정몽필 전 사장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의 장남이 된다. 하지만 정주영 창업주는 5남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 명예회장을 두고 후계자 자리를 고심 중이었다. 1997년 정몽헌 전 회장이 공동회장으로 승격되면서 패권 다툼이 본격화된다.
'왕자의 난'은 2000년 일어난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인사를 통해 정몽헌 전 회장의 측근들을 이동시킨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하는 내정인사였다. 이익치 전 회장은 정몽헌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다.
정몽헌 전 회장이 정주영 창업주를 만나 이 전보조치를 없던 일로 하고 정몽구 명예회장은 회장직에서 경질 당한다. 이후 정몽구 명예회장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현대기아자동차그룹으로 독립한다. 현대자동차와 기아, 현대정공, 현대강관과 현대캐피탈, 오토에버닷컨, 현대이에이치닷컴, 현대우주항공 등 8개사를 계열사로 뒀다.
3.4. 품질 혁명과 '10년 보증'펼쳐보기 접기
"우주선 계기판에 현대차 로고를 붙이면 조종사가 놀라서 귀환을 포기할 것."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 데이비드 레터맨은 현대차의 품질을 이런 말로 비아냥댔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강건한 자동차 왕국을 세우는 데 가장 공을 들인 키워드는 품질이었다. 1990년대까지 현대차는 해외에서 값은 싸지만 쉽게 낡고 고장나는 브랜드 이미지가 강했다.
그는 회장 취임 후 '토요타'를 라이벌로 내세운다. 토요타를 따라잡을 품질까지 끌어올리라는 주문이다. 1999년 정몽구 명예회장은 월 2회 정례 품질 회의를 만든다. 부품을 하나하나 짚으며 '왜 이렇게 됐느냐'고 질문했고, 비전만 나열한 회의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설계한 놈들이 직접 조립해 봐라. 도면만 그려놓고 끝내지 말라"는 말로 설계부터 조립, 품질까지 관리했다. 이 강박은 미국 시장의 10년·10만 마일 보증으로 이어진다. 경쟁사들이 2~3년 보증을 제공하던 시절, 엔진·변속기 문제를 10년까지 책임지겠다는 결정은 사실상 도박이었다.
내부에서는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이 보증을 강행한다. 이미 어느 정도는 품질에 자신이 있었고 보증 비용은 브랜드 회복과 판매 증가로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결과적으로 10년 보증은 현대차 스스로 우리 차를 믿는다는 신호가 됐다.
이 무렵 본사에는 24시간 품질 상황실이 설치됐다. 전 세계에서 올라오는 결함·불만을 실시간으로 취합하고 개선 조치를 검토했다. 토요타 리콜 사태 등 타사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4.1. '현대차나 탈거야?' 이제는 고급화펼쳐보기 접기
2002년 방영된 미드 '프렌즈'에서는 친구 여럿이 로또 당첨을 꿈꿀 때 참여하지 않는 한명을 두고 "다들 당첨돼서 헬기타고 다닐 때 너 혼자 현대차나 타고 다닐거야?"라고 핀잔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1970년생인 정의선 회장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영학 석사를 졸업했다. 현대정공 미국 지사와 일본 이토추 상사에서 현장을 경험했다.
그에게 주어진 첫 큰 미션은 구조조정 대상에 가까웠던 기아였다. 1999년 현대가 기아를 인수했을 때 기아는 파산을 딛고 재기를 시도 중이었다. 북미·유럽에서 '싼 차' 이미지가 강했다.
2005년 기아 사장, 2009년 부회장으로 빠르게 올라선 그는 '기아 리빌딩'의 숙제를 안는다. 정주영 창업주가 길을 트고 정몽구 명예회장이 이 길을 단단하게 했다면, 정의선 회장은 길을 멋지고 우아하게 다듬는 리더이자 길을 또 다른 비전의 출발점으로 만들어야 했다.
4.2. 기아라는 실험실, 피터 슈라이어 영입펼쳐보기 접기
2006년 기아는 아우디 TT·뉴비틀을 디자인한 독일인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최고디자인책임자(CDO)로 영입한다. 한국 완성차 업체가 글로벌 스타 디자이너에게 전권을 주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외신 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정의선 당시 기아 사장이 꽤 공을 들여 푸른 눈의 디자이너를 영입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슈라이어 전 사장은 제안을 거절했다. 유럽의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불린 인물이다. '기아'라는 브랜드가 성에 차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슈라이어 전 사장은 기아의 패밀리 룩, 곧 차만 봐도 기아임을 알 수 있는 특징적인 디자인을 만들고자 했다. 영입 후 내세운 철학은 '직선의 단순화(The simplicity of the straight line)'다. 그 결과물이 지금까지도 기아의 상징성으로 이어지는 '타이거 노즈 그릴'이다.
정의선 사장 시절 기아는 시드·쏘울 같은 모델로 유럽과 북미에서 가성비가 아닌 갖고 싶은 차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슈라이어는 이후 현대·기아 디자인 총괄과 그룹 CDO까지 오르며, 현대차그룹이 디자인에도 사활을 거는 기업이 되도록 이끈다.
4.3. 그룹 2인자에서 총수로펼쳐보기 접기
기아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정의선 회장은 2009년 현대차 부회장. 2018년 그룹 총괄수석부회장으로 입지를 넓힌다. 디젤게이트 이후 규제 강화, 중국 시장 둔화, 전기차 전환이 동시에 밀려오던 시기였다. 2010년대 중반부터 재계와 시장은 그를 오너 3세이자 사실상의 차기 총수로 전제하고 현대차그룹의 행보를 읽기 시작했다.
2020년 10월 그는 현대차그룹 회장에 취임한다. 그룹의 정체성은 자동차 제조기업에서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확장한다. 취임 초기부터 수익성·주주환원과 전동화·소프트웨어·로봇·UAM·수소 투자를 동시에 수행했다.
현대차그룹은 2022년 소프트웨어로 모빌리티 미래를 열다(Unlock the Software Age) 행사를 연다. 이 행사에서 2025년까지 전 세계에서 판매하는 모든 차량을 소프트웨어 기반 차량(SDV·Software Defined Vehicle)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힌다.
2030년까지 전기차(EV) 분야 24조원 투자와 연 364만대 EV 생산능력, 글로벌 EV 톱3 목표도 내놨다.
4.5. 수소·로봇·UAM펼쳐보기 접기
현대차그룹의 수소 전략에서 정의선 회장이 처음 두드러진 건 수소위원회(Hydrogen Council) 활동이다. 현대차그룹은 2017년 수소위원회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정의선 회장은 2019년 공동의장(Co-chair)으로 선임됐다.
현대차그룹은 2028년까지 모든 신형 상용차 라인업에 수소연료전지 또는 전기 파워트레인을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넥쏘,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 같은 기존 제품 외에 수소연료전지 발전 시스템과 수소연료전지 선박 추진체, 철도차량 적용 계획도 함께 소개됐다.
로봇 분야에서는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가 상징적인 사건이다. 현대차그룹은 2020년 12월 소프트뱅크로부터 보스턴다이내믹스 지분 80%를 인수하는 계약을 발표했고 2021년 6월 거래를 마무리했다. 지분은 현대자동차 30%, 현대모비스 20%, 현대건설기계 10%, 정의선 회장 20%로 나뉘었다. 인수 후 현대차그룹과 보스턴다이내믹스는 공장·물류 현장에서 네 발 보행 로봇 '스팟(Spot)' 등을 시험 투입하고 있다.
UAM 분야에서는 2019년 말 UAM 전담 조직 신설 이후, 2020년 CES에서 우버와 함께 전기 수직이착륙(eVTOL) 콘셉트 기체 S-A1을 공개했다. 이후 미국 워싱턴 D.C.에 법인 슈퍼널(Supernal)을 설립해 eVTOL 기체 개발과 인증,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슈퍼널은 공개 행사와 자료에서 2020년대 후반 미국 일부 노선 상업 운항 개시를 목표로 한다는 계획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4.6. 글로벌 무대의 영업사원펼쳐보기 접기
정의선 회장은 주요 시장의 정부·정치권과 직접 만나 협력 조건을 논의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인도와 미국에서 특히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인도에서는 첸나이 공장이 기반이다. 현대자동차 인도법인은 1998년 완공된 첸나이 공장을 통해 인도 내수와 수출 물량을 동시에 담당해 왔다. 이후 추가 투자를 통해 연간 수십만대 규모 생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현대차그룹은 2023년 GM 인디아 탈레가온 공장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2028년까지 생산능력 확대 계획을 공개했다. 인도 진출 25주년을 계기로 정의선 회장은 인도를 방문해 인도 정부·정상과 만나 전기차·내연기관차 투자 확대와 인도 내 생산·고용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에서는 조지아 전기차 전용 공장 투자가 대표적이다. 현대차그룹은 2022년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에 전기차 전용 공장 'Hyundai Motor Group Metaplant America(HMGMA)'를 건설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기공식에서 정의선 회장이 조지아주 주지사와 함께 착공 세리머니에 참석했다. 연 30만대 이상 EV 생산, 수천 명 단위 직접 고용 창출 계획이 함께 발표됐다.
현대차그룹은 한·미 정상회담 계기에 미국 내 전동화·UAM·로보틱스 분야에 대한 추가 투자 계획도 공개했다. 2022년 발표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미국에 전기차·배터리, 로보틱스, UAM 분야에서 100억달러 이상 추가 투자 계획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정의선 회장은 미국 대통령과 면담해 투자 계획과 북미 생산전략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