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회사 오너가 예전에 OO은행에 엄청 시달렸거든. 지금도 회사 CFO가 은행 대출 받자고 하면 학을 떼."
한때는 은행 간부로, 지금은 자기 사업을 하는 한 지인이 꺼낸 말이다. 특정 기업을 콕 집어 언급하진 않았지만 기업금융이나 IB 분야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다. 숫자와 조건으로 설명되는 기업의 자금조달 뒤에는, 이처럼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특히 창업주가 겪은 자금 압박의 경험은 시간이 흘러도 기업의 재무 의사결정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스마일게이트와 셀트리온은 이 같은 자금조달 트라우마가 기업 전략으로 구조화된 대표적 사례다.
스마일게이트는 대표 IP인 '크로스파이어' 출시 후 한때 곳간이 바닥난 적이 있다. 당시 MVP창업투자(현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로부터 투자를 유치했으나 얼마 안 돼 전액 상환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권혁빈 창업자의 오랜 신념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한다. 그는 창업 초기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가 회수 압박을 겪은 후, 외부 자본에 대해 본능적인 거리감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전해진다.
이 같은 인식은 현재까지도 그룹 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유수의 게임사들이 모두 IPO를 한데 반해 스마일게이트는 여전히 비상장이다. 계열사이자 히트작 '로스트아크'를 보유 중인 스마일게이트RPG도 몇 년간 상장 이슈가 있다가 결국 스마일게이트홀딩스와 통합, IPO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런 근간에는 '외부 자본의 간섭 가능성'에 대한 경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셀트리온도 비슷하다. 증권가에서는 서정진 회장이 회사채 발행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셀트리온 계열의 조달 전략은 순수 크레딧보다 에퀴티 또는 메자닌으로 기울어져 왔다. 셀트리온홀딩스는 약 7년 만의 시장성 조달도 전환사채(CB)를 선택했다.
선택의 배경 역시 서 회장의 개인적 경험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셀트리온을 일구던 초기 시절, 사채를 통한 자금조달로 극심한 압박을 겪었던 기억이 회사채 전반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지난해부터 기업어음(CP) 단기 조달에 집중하는 모습 또한 '만기와 통제권을 스스로 쥘 수 있는 자금'에 대한 선호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오너의 과거 경험이 기업의 자금조달 DNA로 굳어졌고 그 결과 CFO의 운신 폭이 구조적으로 제한돼 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는 충분히 소화 가능한 조달 여건이 마련돼 있음에도, 최종 결정 단계에서 번번이 보수적인 선택이 반복된다. 이는 재무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구조 최상단의 '감정' 문제에 가깝다.
기업의 조달 역량과 오너의 개인적 경험은 별개의 일이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자금조달의 최종 결정권은 숫자가 아닌 기억이 쥐고 있다. 오너의 트라우마가 기업의 전략이 되는 순간, 재무는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CFO와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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