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집단의 지배구조가 변화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효율성'이라는 지배구조 개편의 단골 키워드는 기업간의 합병을 설명할 때 주로 활용되지만 때로는 기업의 분할 독립이나 신설을 설명할 때 쓰이기도 한다.
때로는 거대 기업의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원활한 지배구조 확립을 위한 중간지주사가 설립되기도 한다. 오너가 경영에 참여하는 기업집단의 경우 지배구조 개편이 오너의 지배력 강화에 활용되기도 했다.
HD현대그룹은 옛 현대그룹의 '정주영 정신'을 계승한 여러 기업집단 중 하나다. 단일 조선회사에서 시작해 건설기계와 전기장비,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 계열사를 보유한 복합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지배구조 개편이 저마다의 논리에 따라 진행돼 왔다.
HD현대그룹은 지금도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진행 중이며 심지어 잠재적인 개편의 불씨도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HD현대그룹이 지배구조를 개편할 때마다 그 이유가 타당했음을 성장으로 증명해 왔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개편 역시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을까.
이 문서는 HD현대그룹 내에서 일어난 지배구조 개편 활동들을 살펴보고 향후 진행될 개편의 가능성을 조망한다.
2.2.2. 중공업의 경계를 넘어펼쳐보기 접기
현대중공업은 조선이라는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해운, 철강, 플랜트, 화학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넓혔다. 중공업의 경계 바깥에서도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직접 법인을 신설해 사업에 진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 기업을 인수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현대중공업이 자본금을 출자해 해운사 아세아상선을 설립했다. 1978년 6월 인천제철을, 1979년 11월 현대양행을 각각 인수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1983년 국도건설을 인수해 현대전자산업으로 재출범시키며 전자산업에도 진출했다. 1989년에는 현대석유화학 지분 28%를 사들여 관계회사로 편입했다.
2.2.3. 중공업, 다시 하나로펼쳐보기 접기
정몽준 회장이 추진한 중공업 분야 내 비조선사업의 독립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2년 들어 해운 운임이 폭락하면서 글로벌 선박시장에서 발주가 끊긴 탓이다. 당시 국내 조선업계에서는 보유 수주잔고가 모두 소진되는 1994년부터 조업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번졌다.
현대중공업은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1993년 9월 현대로보트산업과 현대철탑산업을, 같은 해 12월 현대중전기와 현대중장비산업을 다시 흡수합병했다. 애초 분할의 논리가 비조선 육성을 통한 조선업 의존도 낮추기였다면 이번에는 당장의 비용 절감 및 사업구조 효율화를 통한 조선업 의존도 낮추기였다.
조선업 중심의 현대중공업은 다시 종합 중공업회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한 차례의 비조선 독립을 통해 개별 법인이 전문성 강화를 바탕으로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경험을 체득했다. 이는 이후 현대중공업이 독자적으로 기업집단으로서의 생태계를 확립하는 과정의 논리적 기반이 됐다.
3. 계열분리와 기업집단 생태계 구축펼쳐보기 접기
2000년대 들어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과 그에 따른 계열분리가 연속됐다. 현대중공업도 2002년 2월 계열분리를 통해 독자적인 기업집단으로 거듭났다. 다만 기존 현대중공업과 자회사들이 그대로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3.2. 신사업 재진출, 명분과 실리펼쳐보기 접기
현대중공업그룹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인수합병과 분할 독립, 신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신사업 진출을 타진했다. 이 시기의 지배구조 개편 논리에는 단순히 미래 성장동력 발굴이라는 실리뿐만 아니라 옛 현대그룹의 유산을 지킨다는 명분도 함께 담겨 있었다.
먼저 계열분리 직후인 2002년 5월 삼호중공업을 인수해 현대중공업의 자회사로 편입했다. 삼호중공업은 원래 범현대가 계열인 한라그룹(현 HL그룹)의 조선계열사로 1999년부터 현대중공업이 위탁경영을 맡고 있었다.
2009년 12월에는 현대종합상사를, 2010년 8월에는 현대오일뱅크를 각각 인수했다. 현대종합상사는 왕자의 난 이후 계열분리가 잇따르는 시기에 경영난을 겪으며 채권단 관리를 받고 있었다. 현대오일뱅크는 2000년 현대정유그룹으로 계열이 분리됐으나 마찬가지로 경영난 끝에 아부다비국영석유회사(IPIC)로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이 3개의 계열사를 인수하면서 현대중공업은 미래 성장동력 발굴뿐만 아니라 현대그룹의 유산을 지킴으로써 '정주영 정신'을 계승하는 옛 현대그룹의 후계자 중 하나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현대오일뱅크는 이후 OCI(현대OCI), 롯데케미칼(현대케미칼), 네덜란드 쉘(현대쉘베이스오일), 일본 코스모오일(현대코스모) 등과 합작사를 설립해 화학산업에도 진출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석유화학의 매각으로 밀려난 화학산업을 다시 포트폴리오에 추가하는 기반이 된 셈이다.
현대중공업은 잇따른 인수합병 이후 기업집단 체제가 안정되자 2016년 들어 유망 기술분야를 독립 분사해 전문성을 강화하는 실리 중심의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했다. 4월 펌프 제조사 현대중공업터보기계, 6월 태양광 패널 제조사 현대중공업그린에너지, 8월 설비 관리회사 현대중공업모스, 12월 선박서비스회사 현대글로벌서비스가 차례로 독립했다.
연속적인 독립 분사를 통해 2016년 말 기준 현대중공업그룹은 모회사 현대중공업이 다수의 주요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일부 자회사들은 다시 손자회사나 합작회사를 보유한 기업집단의 형태를 갖췄다.
4. 지주사체제 전환과 경영권 승계 기반 확립펼쳐보기 접기
2016년의 현대중공업그룹에는 현대중공업이 현대삼호중공업 지분 94.92%를 보유했고 현대삼호중공업이 현대미포조선 지분 42.34%를, 현대미포조선이 다시 현대중공업의 지분 7.98%를 보유하는 순환출자 형태의 지배구조가 형성돼 있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는 현대중공업 지분 10.15%를 통해 그룹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순환출자의 고리를 깨기 위해서는 현대미포조선이 현대중공업 지분 7.98%를 매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현대중공업 지분 7.98%의 외부 유출을 감수하기에는 정몽준 최대주주의 그룹 지배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려면 먼저 최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현대중공업그룹에서는 정몽준 최대주주의 아들인 오너 3세 정기선 부사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그동안 현대중공업그룹은 정몽준 최대주주의 정치활동으로 인해 전문 경영인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정 부사장이 아버지의 지분을 승계하고 오너 경영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순환출자 고리의 해소와 정몽준 최대주주의 지배력 강화, 정기선 부사장의 지분 승계를 위한 준비. 3가지 과제를 풀어내기 위해 현대중공업그룹이 선택한 카드는 지주사체제 전환이었다.
4.1. 4사 인적분할펼쳐보기 접기
2016년 11월 현대중공업은 전력기기사업을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현대일렉트릭), 건설장비사업을 현대건설기계, 로봇사업을 현대로보틱스로 인적분할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현대중공업을 4개의 회사로 나누는 것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이 내세운 지배구조 개편의 논리는 1980년대 후반 주요 사업들을 일제히 독립 분사할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업별 특성을 고려한 효율적 의사결정구조를 확립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존 현대중공업이 안고 있던 3조원이 넘는 차입금을 독립법인에 분담하도록 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2016년은 사이클 산업인 조선업의 업황이 저점에 머물던 시기였다. 5년 전인 2011년만 해도 현대중공업은 조선과 해양부문을 합쳐 154억달러를 수주했으나 2016년에는 두 부문의 수주총액이 36억달러에 불과했다.
조선업의 수주는 1~2년의 시차를 두고 실적에 반영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대중공업은 예고된 조선업 부진의 여파가 다른 계열사에 전이되지 않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물적분할이 아닌 인적분할은 각 독립 계열사의 지분을 현대중공업 지분만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쁠 것이 없었다.
다만 인적분할 이후의 계획이 다소 논란이 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중공업을 4개사로 분할한 뒤 현대로보틱스를 사업형 지주사로 삼는 지주사체제 전환을 함께 계획했다. 2017년 4월 분할이 마무리되며 본격적으로 지주사체제 전환의 작업이 시작됐다.
분할계획 발표 당시 현대중공업은 13.37%의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인적분할과 지주사체제 전환의 과정에서 소위 '자사주의 마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4.1.1. 자사주의 마법펼쳐보기 접기
자사주는 기본적으로 의결권이 없다. 그런데 자사주를 보유한 법인에서 인적분할을 통해 독립한 법인들이 이 자사주도 분할해 보유하게 되면 다른 분할 계열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사주가 아니게 되는 만큼 자사주 비율만큼의 의결권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이를 '자사주의 마법'이라고 한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4사 인적분할 이후 지주사가 될 현대로보틱스가 기존 현대중공업의 자사주 13.37%를 통해 현대중공업, 현대일렉트릭, 현대건설기계 등 3사의 지분을 13.37%씩, 그리고 자사주 13.37%를 각각 확보하게 됐다.
2025년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발효 이전까지 지주사는 상장 자회사 지분을 30% 이상, 비상장 자회사 지분을 50% 이상 보유해야 했다. 현대로보틱스는 분할 과정에서 기존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오일뱅크 지분 91.13%를 모두 가져가면서 비상장 자회사의 지분율 요건은 충족했으나 현대중공업, 현대일렉트릭, 현대건설기계 등 3개 상장 자회사의 지분율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 상장 자회사의 지분율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진행되는 후속 절차가 바로 현물출자 방식의 유상증자다. 인적분할로 설립된 지주사는 유상증자 발행 신주의 대금을 상장 자회사 주식으로 받는다.
여기에 기존 대주주가 참여해 인적분할로 의결권이 부활한 상장 자회사들의 주식을 출자하고 지주사 신주를 받는다. 대주주는 상장 자회사들에 지배력을 투사하기 위해 지주사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할 뿐 상장 자회사의 직접 지분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우는 정몽준 최대주주가 기존 현대중공업 지분을 10.15% 보유하고 있었다. 분할 이후에는 현대로보틱스뿐만 아니라 나머지 3개 분할 계열사 지분도 10.15%씩 보유했다는 말이다. 이 3개 계열사 지분을 현대로보틱스에 출자하고 대신 현대로보틱스의 신주를 받았다.
유상증자가 끝난 뒤 현대로보틱스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일렉트릭, 현대건설기계 지분을 각각 24.13%, 27.84%, 27.64%까지 확보해 지주사의 상장 자회사 지분율 요건을 충족했다.
동시에 정몽준 최대주주의 현대로보틱스 지분율이 기존 10.15%에서 25.8%까지 확대됐다. 인적분할과 현물출자 유상증자를 통해 현대중공업그룹 지배구조의 2가지 난제 중 하나인 최대주주의 지분율 확대 과제가 풀렸다.
4.2.1. 지분 중복소유 해소펼쳐보기 접기
현대중공업그룹은 완전히 지주사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아직 해결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먼저 순환출자 고리에 기인한 지분 중복소유 문제다. 지주사체제에서는 한 회사의 지분을 그룹 내 여러 회사가 보유할 수 없는데 인적분할로 인해 현대미포조선이 보유한 기존 현대중공업 지분 7.98%의 의결권이 4개 계열사에서 부활했다. 이 지분을 처분해야 했다.
현대미포조선은 2017년 7월 지주사 현대로보틱스 지분을 전량 블록딜로 기관투자자에 매각한 뒤 같은 해 8월 현대일렉트릭과 현대건설기계 지분을 현대로보틱스에 팔았다. 신 현대중공업 지분은 2017년 10월 3.19%를 먼저 블록딜로 기관투자자에 매각한 뒤 2018년 8월 나머지를 현대로보틱스에 넘겼다.
4.2.2. 금산분리펼쳐보기 접기
일반지주회사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사를 소유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중공업그룹은 2002년 계열분리 당시 함께 분리된 현대기업금융과 현대기술투자, 현대선물 2개 자회사를 포함한 3사에 2008년 인수한 하이투자증권(옛 CJ투자증권) 등 4개의 주요 금융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17년 11월 현대기업금융과 자회사 현대기술투자를 정주영 창업주의 8남인 정몽일 회장이 이끄는 현대미래로그룹에, 하이투자증권과 현대선물을 DGB금융그룹에 각각 매각했다. 하이투자증권과 현대선물 매각의 경우 DGB금융지주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금융위원회 승인이 지연되는 등 진통을 겪기도 했으나 2018년 9월 최종 승인 결정이 내려졌다.
4.2.3. 증손회사 지분 요건 충족펼쳐보기 접기
인적분할 및 지주사체제 전환 이후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로보틱스-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으로 이어지는 조선부문의 지배구조가 구축됐다. 그런데 법령상 지주사의 손자회사는 지분을 100% 보유할 때만 증손회사를 거느리는 것이 허용되지만 현대삼호중공업의 현대미포조선 지분율은 42.34%에 불과했다.
현대삼호중공업이 현대미포조선의 나머지 지분을 모두 사들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대규모의 자금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현대미포조선이 상장사였던만큼 과반 이상의 대규모 지분을 공개매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대미포조선을 매각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사업은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이 대형 선박을, 현대미포조선이 중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형태로 이원화돼 있으며 대형 선박과 중소형 선박은 시장이 다르다. 즉 대형 선박 중심의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중소형 선박 중심의 현대미포조선은 조선업의 사이클 리스크를 헤지하는 계열사로서 전략적 가치가 높다.
여기서 다시 묘수가 나왔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18년 9월 현대삼호중공업을 투자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한 뒤 현대미포조선 지분을 보유한 투자회사를 현대중공업이 흡수합병하는 방안을 실행했다. 이를 통해 현대미포조선이 현대로보틱스의 증손회사가 아닌 손자회사로 격상되면서 증손회사 지분율 요건 문제도 해소됐다.
5. 중간지주사 설립으로 3대 사업부문체제 확립펼쳐보기 접기
현 HD현대그룹은 크게 △조선 △건설장비 △에너지 등 3대 사업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사업회사 HD현대오일뱅크가 주축을 맡고 있는 에너지사업을 제외하면 나머지 2개 부문은 중간지주사가 관리하는 형태다.
조선과 건설장비 두 부문의 중간지주사체제 구축 과정에는 대형 M&A가 연계돼 있었다. 조선부문의 M&A는 무산됐지만 건설장비부문은 성공했다. 물론 M&A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중간지주사체제 구축에는 사업부문별 컨트롤타워를 세워 파편화된 사업을 통합적으로 관리한다는 지배구조 개편의 논리가 있었다.
5.1. 조선 중간지주사 한국조선해양펼쳐보기 접기
현대중공업그룹의 지배구조는 2019년 또 한 차례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이 해 3월 현대중공업은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 딜은 구조가 상당히 특이했다.
먼저 현대중공업이 투자회사 한국조선해양(가칭)을 존속법인으로 하고 사업회사 현대중공업을 100% 자회사로 신설하는 물적분할을 실시한다. 이후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보유지분 전량인 55.7%를 한국조선해양에 출자하고 한국조선해양은 산업은행에 보통주 지분 7.9%와 1조2500억원 규모 우선주를 신규 발행해 넘기는 지분 교환 방식이다.
즉 이 딜이 성사된다면 현대중공업그룹에는 현대중공업지주가 조선 중간지주사 한국조선해양을 거느리고 한국조선해양이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3사에 대우조선해양을 더한 4개 조선사를 소유하는 중간지주사체제가 구축된다.
산업은행은 IMF 이후 대우중공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설된 대우조선해양을 2000년 자회사로 편입한 이후 민영화하기 위한 시도를 지속해 왔다. 2008년에는 한화그룹이 인수 본계약까지 체결했으나 금융위기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반면 구매자인 현대중공업그룹 입장에서는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일장일단이 있는 도박수에 가까웠다. 대형 조선사의 인수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를 하나 줄일 수 있지만 당시 조선업황이 좋은 편이 아니었을뿐더러 대우조선해양은 과거 분식회계로 인해 재무구조가 부실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관계로 인해 현대중공업이 산업은행에 직접적으로 주식 매입대금을 지급하지 않는 지분 교환 형태의 딜이 성립한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2019년 6월 물적분할을 실시해 대우조선해양 인수 선결조건인 중간지주사 설립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한국조선해양은 한국, 중국, 카자흐스탄, 싱가포르, 일본, 유럽연합(EU) 등 6개국의 관계당국에 기업결합심사를 신청했는데 단 한 곳인 EU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국조선해양이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조선 사업계열사들을 소유하는 중간지주사체제는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이후 한국조선해양은 2022~2023년에 걸친 그룹의 사명 변경을 통해 HD한국조선해양으로 간판을 교체했다.
6. 사명 변경과 중간지주사체제 이후의 지배구조 개편펼쳐보기 접기
2022년 2월 현대중공업지주는 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HD현대로 사명을 변경했다. 기존 현대중공업그룹의 ‘중공업’이라는 단어에 투영된 제조업 중심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역동적으로(Human Dynamic) 신사업을 발굴하는 투자형 지주회사로 거듭나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현대중공업지주를 시작으로 2023년까지 그룹의 모든 계열사들이 'HD'를 내세운 사명 변경을 실시했다.
HD현대뿐만 아니라 산하 계열사들도 신사업 발굴에 더욱 공격적인 자세로 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건의 인수합병이 발생했다. 먼저 2022년 4월 HD현대일렉트릭이 전력변환장치(인버터) 전문기업 플라스포를 인수했고 2023년 7월에는 HD한국조선해양이 엔진회사 STX중공업 인수 본계약을 체결했다. HD현대마린엔진 인수는 기업결합심사를 거쳐 2024년 7월 마무리됐다.
2025년 들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배타적 관세정책으로 인해 글로벌 경기의 불확실성이 심화하자 HD현대그룹은 또 다시 지배구조 개편을 통한 대응에 나섰다. 이번에는 1990년대 중반 조선업 불황에 대응해 현대중공업이 다시 단일체제로 회귀하던 당시의 사업구조 효율화 논리가 적용됐다.
2025년 7월 HD현대건설기계외 HD인프라코어의 합병 안건이 양사 이사회를 통과했다. 같은 해 9월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주주 승인도 받았다. 양사 통합법인은 2026년 1월 HD건설기계로 출범할 예정이다.
양사는 이미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관리 하에서 공통 브랜드 '디벨론(DEVELON)'으로 브랜드를 통합하는 등 융합의 준비를 진행해 왔다. HD현대그룹에서는 중복사업을 최소화하고 의사결졍구조를 일원화하는 것으로 건설장비사업의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2025년 8월에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합병 안건이 이사회에서 결의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임시주총을 거쳐 승인을 받았다. 2025년 12월1일을 기일로 합병법인이 출범할 예정이다. 한미 합작 조선업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로 인해 방산 분야에서 사업기회가 증가하는 만큼 양사의 자원과 역량을 결집해 성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7. 여전히 남은 지배구조 개편의 불씨펼쳐보기 접기
2025년 11월 기준으로 HD현대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현재진행형이다. 확정된 개편작업들이 마무리되더라도 여전히 일부 불씨가 남아있게 된다.
가장 가시성 높은 개편의 뇌관은 건설장비부문에 있다. HD현대건설과 HD현대인프라코어가 합병해 HD건설기계가 출범하고 나면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실질적으로 HD건설기계 1개 자회사만을 거느린 중간지주가가 된다. 통합 관리자로서 중간지주사의 역할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계열사간 합병을 통해 사업구조를 효율화한다는 지배구조 개편의 논리에 비춰 볼 때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볼 수 있다. 아직 HD현대그룹은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미래와 관련해 확실한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이외에 그룹의 지배구조상 현재 위치가 어울리지 않는 계열사들도 있다. 먼저 태양광패널 제조사 HD현대에너지솔루션은 엄연히 에너지 관련 계열사임에도 조선 부문 중간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의 자회사다. HD현대마린솔루션과 아비커스는 조선 관련 계열사임에도 HD한국조선해양이 아닌 지주사 HD현대가 직접 거느리고 있다.
HD현대그룹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논리로 다양한 방식의 지배구조 개편을 실시해 온 만큼 남아있는 개편의 불씨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타오르게 될지, 혹은 그대로 열기를 잃게 될 지 쉽사리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지배구조 개편에서 명백히 '오답'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사안은 없었다. 나름의 논리를 토대로 진행된 지배구조 개편작업은 모두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대를 거치면서도 HD현대그룹의 '역동적인 DNA'는 퇴색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