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이재용 회장의 말 중에 기억나는 게 뭐냐고 후배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결같이 나온 대답이 '쉿'이었다. 몇 해 전 대통령과 시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시민들에게 약간은 장난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그 모습이 밈으로 인터넷에 회자됐고 그게 뇌리에 오래 남았다. 이 장면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이 회장의 어록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이 회장도 경영현장에서 많은 말을 남겼다. 2022년엔 유럽 출장 귀국길에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다"라고 말했다. 세상에 없는 기술을 만들자며 기술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계속 나왔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며 '승어부'라는 표현을 인용한 적도 있다.
이 회장은 겸손과 실용주의가 몸에 밴 스타일이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전문 경영인을 앞세우는 게 많다. CEO 승계도 이사회에서 맡기도록 그룹 거버넌스 체계까지 바꿨다. 어록보다는 실제 경영에 더 매진한다.
하지만 이재용 회장이 국민들에게, 혹은 재계에 비전이나 화두를 던진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회장 취임 4주년이 되는 올해에도 조용히 선영을 방문했을 뿐이다.
이 회장뿐만이 아니다. 창업 세대가 물러나고 2, 3세대로 내려오면서 대기업 총수들의 메시지는 뜸해졌다. 과거 창업 세대들은 글도 남기고 언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던졌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을 남겼고 이건희 회장은 때마다 화두를 던졌다. 이 회장이 던진 한마디 한마디는 '천재경영' '마하경영' '창조경영'이란 화두가 돼 재계 전반에 퍼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직원들을 향해 일갈했던 신경영 강의는 이 시대에도 통하는 메시지다. 생전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란 칼럼까지 신문에 기고했다.
정주영 회장은 '이봐 해봤어'라며 현대의 그룹문화를 만들었다. 현대만큼 진취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했던 그룹도 없었다. 김우중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란 말을 했다. 여전히 글로벌 시장에선 대우란 이름이 먹힌다. LG에선 구인회 회장이 '우리가 한번 해보는 기라'라는 말을 남겼다. 창업세대부터 내려온 인화는 그룹의 문화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당시 총수들은 때마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고 간담회를 했다. 해외 출장길엔 전세기를 띄워 하늘에서 간담회를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2, 3세로 내려오며 이런 일화들이 사라졌다. 메시지가 화가 된다는 경험이 생겼고 말을 조심하는 분위기가 됐다. 세월이 달라졌고 기록 매체가 달라졌다. 몇몇 특이 케이스를 빼면 말을 남기는 게 부자연스러워졌다.
영상 매체가 커지며 글 대신 영상을 남기는 오너들은 꽤 있다. 최근 최태원 회장은 EBS에 출연해 청년들에게 AI 시대 미래를 준비하라고 화두를 던졌다. '대학 졸업장 대신 경험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멘트 때문에 온 나라 학부모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됐지만 AI 시대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꼭 들어야 할 얘기였다.
젠슨 황 엔비디아 회장은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청년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위대해 지려면 고생해야 한다'라며 본인의 삶에 비춘 교훈을 전했다.
국정 감사 시즌이 지나며 정치권에선 각종 혐오의 발언들이 쏟아졌다. 편가르기를 하고 남의 흠집을 들춰내는 게 일상이다. 혐오의 발언은 재생산을 거듭하며 귀를 아프게 한다. 이런 말들만 듣다보면 한국의 미래가 암울하다. 여전히 정치 4류, 행정 3류의 세상이다.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일류 대접을 받고 있다. 메이드인코리아, K팝, K컬처는 글로벌 시장에서 통한다. 그 기업을 이끄는 총수들의 메시지는 정치판의 혐오의 말과는 다를 것이다.
10년 뒤 후배들이 기억하는 재계 리더의 말이 여전히 '쉿'뿐이라면 너무 아쉽다. 혐오의 말이 넘치는 시대,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일류가 된 기업인들이다. 이제 '쉿' 대신 그들의 한마디를 듣고 싶다. 그 비전을 들어 봐야 진짜 밸류업에 베팅할 수 있지 않겠나.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