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업무를 하다보면 댓글에서 뜻밖의 통찰을 만날 때가 있다. 삼성전자의 역대급 재고(71조원)를 다룬 영상에 이런 글이 달렸다. "장기계약 때문에 재고 저만큼 없으면 원자재 및 소재 단위에서 쇼크 올 것 같은데."
마침 삼성전자도 2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장기공급계약(LTA)을 비중 있게 다뤘다. 관련 내용을 뽑아 AI에게 물었더니 LTA가 메모리 사업의 구조를 조선업 같은 형태로 바꿀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메모리가 '수주산업'에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 삼성전자 스스로 '중장기 수주 비중'이라는 표현을 쓴 점도 눈에 들어왔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호황기에 공장을 늘리다 공급이 넘치면 재고가 쌓이고 가격이 떨어져 감산에 들어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십조 이익과 적자를 오가는 이유다.
LTA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캐파의 60~70%를 장기계약으로 묶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최근에는 내년 공급 물량의 80% 가까이가 이미 장기계약으로 채워졌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기본 계약기간은 5년이며 매년 1년씩 연장한다. 선수금 일부도 이미 받았다. 범용 제품에는 가격 하한선까지 설정한다.
조선·플랜트 사업과 엇비슷한 구조다. 조선사는 수주잔고를 바탕으로 미래 일감을 가늠한다. 메모리와 선박은 다르지만 삼성전자 역시 LTA로 수요를 예측하고 투자 시기를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경기순환에 흔들리던 사업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구조로 바꾸겠다는 설명도 내놨다.
캐파 전부를 묶지 않는 데도 계산이 있다. 계약 물량으로 가격 하락의 충격을 줄이고 나머지는 시장에 맡겨 상승의 과실을 노린다. 호황과 불황의 진폭을 줄이면서 수익 기회도 남기는 셈이다. 다만 수요가 몰리는 만큼 목표 비율이 유지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래서 71조원의 재고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팔리지 않은 완제품과 생산에 필요한 원재료·재공품은 성격이 다르다. 장기 공급을 약속한 기업이라면 일정 수준의 재고는 공급 안정성을 위한 자산일 수도 있다.
물론 LTA가 만능은 아니다. AI 투자 확대로 고객사들이 물량 확보에 나서지만 지금의 협상력이 영원할 수는 없다. 구매 의무와 가격 하한선의 실효성도 따져봐야 한다. 선수금 역시 향후 공급 의무가 따르는 부채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변화다. 그간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은 기술과 생산 효율로 평가받았다. 앞으로는 장기 수요를 확보해 투자와 현금흐름으로 연결하는 능력도 중요해질 수 있다. 기술만큼 계약 설계 능력이 경쟁력이 되는 셈이다.
댓글 하나가 71조원의 재고에서 반도체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AI의 해석은 검증이 필요하지만 익숙한 숫자에서 새로운 질문을 끌어내는 데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를 수주산업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얼마나 생산하고 얼마에 파는지를 넘어, 아직 만들지 않은 반도체를 누가 얼마나 오래 사주기로 약속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어쩌면 메모리 산업의 다음 경쟁은 공장 안이 아니라 계약서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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