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바이오로직스가 3조원 규모의 유상증자에 나선다. 스위스 펩타이드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대형 M&A에 대형 유증. 여기까지만 보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눈길을 끈 건 다른 대목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애초 인수자금을 보유 현금과 차입금으로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 달여 만에 계획을 바꿨다. 차입 대신 대규모 증자를 택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차입의 경우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빚을 지고 갚으면 될 일이다. 유증을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대주주 삼성물산(43.06%)과 주요 주주 삼성전자(31.22%)도 지분율을 유지하려면 지갑을 열어야 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금 조달이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의 자본배분 문제로 바뀐 것이다. 한 회사의 재무전략으로 끝날 일이 그룹 주요 계열사 세 곳의 돈이 동시에 움직이는 일이 됐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을 맞아 조 단위 출자 여력이 충분하다. 문제는 삼성물산인데, 때마침 카타르 플랜트 현장에서 선수금이 대거 들어오면서 곳간이 넉넉해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차입에서 유증으로 선회한 배경에는 삼성물산의 달라진 재무상태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최대주주의 1조원대 출자 여력을 확인하지 않고 유증을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누가 차입 대신 번거로운 유증을 택하고 재무전략의 방향을 틀었을까.
우선 각 사의 CFO가 움직여야 한다. 유승호 삼성바이오로직스 경영지원센터장, 강병오 삼성물산 경영기획실장, 박순철 삼성전자 전사 경영지원담당이다. 세 회사의 돈이 움직이니 각자의 재무상태와 투자계획을 맞춰보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삼성에는 계열사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사업지원실이 있다. 수장은 박학규 사장이다.
사람을 따라가다 보니 낯익은 조직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삼성그룹의 옛 컨트롤타워 미래전략실이다. 네 사람 모두 미전실 출신이다.
이걸 단순한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삼성 같은 거대 그룹에서 수조원짜리 M&A와 증자, 계열사의 1조원대 출자가 각 회사에서 따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돈의 규모가 커질수록 각자의 판단만으로 움직이기는 어려워진다. 특히 빚을 내겠다던 회사가 유증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그룹 차원의 사전 교감 없이 가능했을까.
사람의 경력은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더구나 이들이 몸담았던 미전실은 그룹의 전략과 투자, 자본배분을 조율하던 곳이었다. 과거 같은 조직에서 비슷한 문제를 다뤘던 사람들이 지금은 각 계열사의 핵심 재무라인에 흩어져 있는 셈이다.
미전실은 2017년 간판을 내렸다. 벌써 9년 전이다. 하지만 조직을 없앤다고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경험과 네트워크, 의사결정 방식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직은 사라졌어도 사람은 남았다. 삼성바이오 유증에 옛 미전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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