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롯데건설 자본확충에선 그룹 차원의 적극적 지원이 두드러진다. 계열사들이 신용을 보강해준 덕분에 수천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다만 자금줄 흐름을 보면 힘의 균형에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롯데건설의 최대주주인 롯데케미칼이 업황 부진으로 주춤한 사이, 호텔롯데와 롯데물산 등 이른바 ‘일본 롯데’ 계열사들이 구원투수로 전면에 나섰다. 위기 관리의 무게중심이 일본 자본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대주주 롯데케미칼 빈자리… 호텔·물산이 메웠다 롯데건설이 발행을 결정한 신종자본증권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신용 보강이다. 내년 1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총 7000억 원 규모의 영구채를 찍는데 호텔롯데가 4000억원, 롯데물산이 3000억원 규모로 자금보충약정을 제공해 롯데건설의 뒤를 바쳤다. 하지만 정작 최대주주인 롯데케미칼은 지원군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롯데케미칼의 부재는 예견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석유화학업계가 업황 침체,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부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케미칼도 작년부터 줄줄이 자산매각과 함께 구조조정에 나선 상태다. 최근엔 여수공장의 헤셀로스 생산설비를 자회사인 롯데정밀화학에 1270억원 받고 넘기기기도 했다. 매각 형태로 자회사 유동성을 끌어온 셈이다. 본업 방어에 급한 상황에서 자회사에 지원을 보내기엔 무리가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구원투수로 등판한 호텔롯데와 롯데물산이 모두 이른바 ‘일본 롯데’에 속한다는 점이다. 호텔롯데는 일본 롯데홀딩스와 일본롯데계열 L투자회사, 일본 광윤사 등 일본 롯데 자본이 지분의 99% 이상을 차지한다. 롯데물산 역시 일본 롯데홀딩스(60.1%)가 최대주주, 호텔롯데(32.83%)가 2대주주다.
결국 한국 롯데 자금줄인 롯데케미칼의 손발이 묶인 사이, 여력이 있는 일본 롯데 계열사들이 전면에서 롯데건설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형국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그동안 한일 롯데를 통합 경영하는 ‘원 롯데’를 강조해왔지만 롯데건설에선 일본 롯데 측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롯데건설의 지분구조를 보면 롯데케미칼이 44.02%, 호텔롯데가 43.3%를 보유 중이다. 차이가 0.8%p에 그친다. 주주 구성만으로는 어느 쪽 영향력이 압도적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그간엔 롯데케미칼이 최대주주고, 신동빈 회장이 롯데케미칼 대표이사인 만큼 롯데건설을 한국 롯데 쪽으로 분류했지만 최근 자금 흐름을 보면 미묘한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레고랜드 사태부터 이어진 '일본 롯데' 우회 지원 이런 흐름은 2022년 레고랜드 사태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2022년 말 롯데건설이 전환사채를 찍었을 때 호텔롯데이 적극 지원에 나선 게 대표적이다. 당시 롯데건설은 20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를 발행했고, 이 CB를 인수한 특수목적법인(SPC)과 호텔롯데가 TRS를 체결했다.
최대주주인 롯데케미칼을 제치고 호텔롯데가 TRS를 맺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작지 않다. TRS의 성격상 CB에 대한 형식적 소유권은 SPC에 있지만 실질적 소유권은 호텔롯데에 속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2023년 롯데건설이 메리츠금융그룹과 투자협약을 맺고 조성한 1조5000억원 규모의 공동펀드(샤를로트제일차·제이차)에서도 일본계 계열사 비중이 높았다. 후순위 대여로 투입된 계열사 자금 6000억원을 롯데정밀화학, 호텔롯데, 롯데물산이 분담했다.
1년 뒤인 지난해엔 리파이낸싱 형태로 다시 ‘프로젝트 샬롯’ 펀드가 만들어졌다. 2조3000억원 가운데 계열사 지원규모가 7000억원을 차지했다. 롯데정밀화학과 롯데물산이 각각 2000억원, 호텔롯데와 롯데캐피탈이 각각 1500억원을 태웠다.
이중 롯데캐피탈은 롯데홀딩스 자회사인 롯데파이낸셜이 51%, 호텔롯데가 32.59%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롯데정밀화학이 제공한 2000억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5000억원은 전부 일본 롯데 쪽이 채워넣었다는 이야기다.
반면 롯데쇼핑이나 롯데웰푸드, 롯데칠성음료 등 롯데지주 산하의 ‘한국 롯데’ 계열사들은 지원 사격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 롯데쇼핑(40%)과 롯데웰푸드(47.47%), 롯데칠성음료(45%)는 모두 롯데지주가 최대주주다. 특히 롯데쇼핑은 그룹 간판인 데다 꾸준히 점포를 출점해야 하는 특성상 롯데건설과 관계가 긴밀한 계열사지만 지원에서 빠졌다.
업계 관계자는 “레고랜드 사태 이후 역학 관계가 이동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롯데건설의 유동성을 일본계 계열사들이 지탱하고 있다는 건, 향후 경영 정상화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본 롯데 측의 입김이 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