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중공업이 선박 건조역량을 해외로 분산하는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고부가 선박과 방산사업에 집중하고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일감은 해외 조선소로 돌려 최적의 생산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당분간 해외에서 적지 않은 투자 소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HD현대중공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역임 중인 이철헌 재경본부장 전무는 HD현대중공업의 실적 개선기에 CFO로 부임해 HD현대중공업을 순차입에서 순현금 기조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박 건조량 증가 및 투자 확대에 대비해 비주력자산의 매각에 나서는 등 자금 관리에 한층 고삐를 당기고 있다.
◇조선업 구조개편 마무리, 이제는 투자의 시간 HD현대중공업과 모회사 HD한국조선해양의 2025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 투자법인 HD현대아시아홀딩스가 베트남 조선소 HD현대베트남조선, 필리핀 조선소 HD현대중공업필리핀, 베트남 선박기자재법인 HD현대에코비나(옛 두산비나) 등 해외 생산거점들을 자회사로 거느리는 체제가 구축됐다.
HD현대아시아홀딩스는 HD현대그룹이 해외 조선사업을 일원화하기 위해 설립한 중간지주사로 HD한국조선해양이 지분 60%, HD현대중공업이 40%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향후 HD현대그룹의 해외 조선업 투자는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이 HD현대아시아홀딩스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HD현대그룹은 해외 생산체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여러 투자계획들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인도 타밀나두주 정부와 현지 조선소를 짓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 현지 언론에 따르면 총 투자비용이 최대 40억달러(6조원가량)에 이른다. 핵심 기자재 공급망의 강화를 위해 HD현대에코비나가 5000억원가량을 투자하는 계획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련의 투자비용은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이 HD현대아시아홀딩스 지분율에 따라 6대 4로 출자하게 될 공산이 크다. 다만 투자계획을 이행하기 위한 자금 관리의 과제는 HD현대중공업 쪽이 HD한국조선해양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 업계 시선이다.
HD한국조선해양은 자체사업이 있기는 해도 규모가 작아 배당 이외의 지출이 크지 않은 중간지주사다. 반면 HD현대중공업은 배당과 투자 이외에도 선박 건조를 위해 일정량의 현금을 상시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선박시장에서는 선박 건조계약을 체결할 때 총 계약금액의 50% 이상을 선박 인도시에 지급하는 헤비테일(Heavy-Tail) 계약이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조선사들은 선박 건조에 필요한 비용을 자체 자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는 조선사의 자금시재에 큰 변동성을 야기한다. HD현대중공업을 예로 들면 지난해 2분기 말 2조8360억원을 기록했던 현금 보유량(현금 및 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의 합)이 3분기 말 4조261억원까지 치솟았다가 4분기 말 다시 3조5724억원까지 줄어든 바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현금 보유량이 늘어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인 비용 압력을 견뎌내야 한다는 말이다.
◇갈수록 커지는 비용 압력, 비주력자산 매각으로 완화 나서 이철헌 현대중공업 CFO는 2023년 11월 그룹 인사를 통해 HD현대일렉트릭 CFO에서 HD현대중공업 CFO로 옮겼다. HD현대일렉트릭을 거치기는 했어도 애초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 해양원가관리부로 입사해 재무분석팀 팀장과 재무담당 상무보 등을 역임한 조선업 재무관리의 전문가다.
이 CFO가 HD현대중공업 CFO에 부임한 2023~2024년은 HD현대중공업이 2021년 하반기 이후의 선가 상승기에 높은 가격으로 수주한 선박들의 건조가 본격화되며 실적이 개선되는 시기였다. HD현대중공업은 2022년 영업손실 2982억원을 기록했으나 2023년에는 영업이익 1786억원으로 흑자전환했고 이듬해 2024년에는 영업이익이 7052억원으로 증가했다.
이 기간 HD현대중공업의 순영업활동현금흐름(NCF)은 712억원에서 1688억원, 2024년에는 무려 2조8839억원까지 불어났다. 이 CFO는 영업에서 벌어들인 현금을 차입 상환에 투입해 HD현대중공업의 총차입금을 2023년 3조1681억원에서 이듬해 1조1842억원까지 줄였다.
HD현대중공업은 2019년 옛 현대중공업의 물적분할에 따른 출범 당시부터 2023년까지 차입금이 현금 보유량을 웃도는 순차입 경영을 지속해 왔으나 2024년 처음으로 순차입금이 마이너스(-) 2047억원 기록하며 실질적 무차입경영에 들어섰다. 작년 말 기준으로는 총차입금이 6821억원까지 줄어들면서 순차입금도 -2조8903억원까지 내려왔다.
차입 부담 대비 현금 여력이 압도적이기는 해도 이 CFO는 선박 건조량 증가로 인한 단기적 비용투입 압력의 증대를 꾸준히 대비해야 한다. HD현대중공업은 올 초 공시를 통해 올해 매출 전망치를 24조4084억원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 이는 지난해 대비 38.8% 증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해외 야드의 경쟁력 강화 및 신규 조선소 설립 투자 본격화, 한국-미국 조선협력계획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위한 미국 투자 가능성 등 변수들까지 고려하면 이 CFO로서는 자금 관리에 고삐를 늦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 CFO는 이미 비주력자산을 매각하고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은 HJ중공업의 모회사인 에코프라임마린퍼시픽과 HD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매각을 위한 합의각서를 체결했다.
HD현대중공업은 1조2000억원을 투자해 2010년 군산조선소의 가동을 시작했으나 이후 글로벌 수주절벽으로 인해 2017년 문을 닫았다. 이후 2022년 선박용 블록 제작공장 용도로 일부 설비를 재가동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선박 건조에는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군산조선소의 장부가액은 2021년 말 기준 6650억원으로 시장에서는 매각 가격이 1조원 안팎에서 형성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