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CFO

thebell desk

롯데의 솔직한 선택

원충희 서치앤리서치(SR)본부 부장  2026-01-06 07:52:40
지주회사 CEO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룹 전략통이거나 오너의 신임을 받는 관리자형 혹은 그룹의 캐시카우를 쥐어본 핵심 계열사 사장이다. LG의 권봉석 부회장, 롯데의 황각규 전 부회장을 생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와 달리 지주사 CFO는 중요하지만 조연에 가깝다. 숫자를 관리하는 역할이지 비전을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CFO가 CEO로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지주사라면 더 그렇다. GS 홍순기 부회장은 이례적인 케이스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이런 공식은 종종 깨진다. 시장의 질문이 "다음 비전이 무엇인가"에서 "이 회사 괜찮은 건가"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필요한 CEO는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설명하는 사람이다. 차입 만기는 언제고, 우발채무는 어디에 있고, 가용현금이 얼마인지 등 이런 질문에 즉답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CFO다.

롯데지주가 CFO인 고정욱 사장을 CEO로 선택한 이유도 여기 있다. 석유화학 업황은 롯데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다. 배터리 소재 역시 시간이 더 필요하다. 건설 PF 리스크도 선언 몇 마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롯데가 맞닥뜨린 문제는 전부 성격이 비슷하다. 당장 해결할 수는 없지만 관리하지 않으면 더 커질 수 있는 이슈들이다. 이 지점에서 CFO 출신 CEO는 꽤 논리적인 선택이 된다.

CFO 출신 CEO의 성적표는 화려하지 않다. 홈런이 아니라 볼넷과 병살타로 경기를 관리한다. 평가도 늦게 나온다. 시간을 얼마나 벌었는지, 신용이 얼마나 안정됐는지, 다음 국면에서 누가 운전대를 잡아도 괜찮은 상태를 만들어 놓았는지가 기준이다.

그래서 이번 인사는 공격 선언보다 수비 포메이션 변경에 가깝다. 롯데는 화려한 전술 대신 골문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실점을 막고 시간을 벌고 다음 이닝을 준비하려는 판단이다. 이 선택이 멋져 보이지 않을 수는 있으나 솔직하다. 지금 롯데에 필요한 건 거창한 비전보다 흔들리지 않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숫자가 버텨주는 동안 반등의 기회를 준비할 수 있다.

롯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지 않았고 현실에 맞는 카드를 꺼냈다. 위기를 위기라고 인정하는 용기, 그에 맞는 인사를 전면에 세운 결정. 이 선택이 롯데를 바로 구원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게 만들 가능성은 충분하다. 때로 기업에 가장 중요한 건 멋지게 달리는 게 아니라 넘어지지 않고 버티는 일이다. 이 솔직한 선택이 롯데가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